런던에 오니까경주에 있다가 부산에 온 느낌이다. 뭔가 더 화려하고 바쁘고 세련됐다. 파리가 문화재 보존하느라 개발 못(안)한 도시라면 런던은 더 현대적인 느낌? 초록 신호등에 깜빡이도 있고 숫자 카운트다운도 된다. 보행 좌측통행도 표시돼 있다(파리엔 없다). 내 가이드 구씨(구글맵)가 여전히 방향 파악을 못해서 세 사람에게 길을 물었는데 그중 한 번은 익스큐즈미가 끝나기도 전에 손사래를 당했다(둘은 그래도 친절했지만 그중 하나는 잘못 알려줬다). 역시 싸늘한 도시다. 지하철역 묻는 게 익스큐즈가 안 되나 보다.
버킹엄궁 앞에 파리 곰돌이라니! 다소 미안했지만 근위병 교대식이 없는 날이라 헛걸음을 해서 쌤쌤 치기로 한다. 깃발이 걸린 걸 보니 찰스왕은 저 안에 있다
파리에서는 소매치기를 조심하고 런던에선 사기를 조심하라는 얘기를 어디선가 얼핏 들었는데 첫날부터 희생양이 될 뻔했다. 아까 런던 눈알(eye)을 탄 뒤 다리를 건너는 도중에 야바위꾼을 만났다. 그 앞에 남녀 여럿이 있었는데 컵 세 개 중 공이 어디로 들어가는지 맞히는 돈 놓고 돈 먹기였다. 재밌어서 사진을 찍으려니까 안 된단다. 아무튼 나는 구경을 했는데 사람들이 적극적이다. 맞혀서 따기도 하고 잃기도 했다. 몇 순배가 돌고 아무도 안 거는 판에서 야바위꾼이 나한테 공이 어디 있을 것 같냐고 묻는다. 가운데(너무 쉬웠다)라고 했더니 오~정답! 하더니만 판돈을 걸지도 않은 내게 지폐 두어 장을 주려고 한다. 순간, 그게 미끼라는 사실을 알겠더라. 타짜는 초짜에게 초반에 잃어주고 나중에 홀딱 벗겨 먹는다며? 노땡큐를 연발하며 멀어지면서 둘러싸고 있던 사람들이 모두 바람잡이였음을 직감했다. 조금 더 건너오니까 그런 팀이 하나 더 있었다. 하여간 동서고금에 이런 작자들은 늘 있어왔지.
런던 눈알에서 내려다 본 템즈강, 빅벤과 웨스트민스터가 있다. 저 다리 위에 야바위꾼들이 영업하고 있으니 조심할 것
이곳에게는 미안한 얘기지만 나는 영국에 큰 애정이 없다. 관심도 덜하고 공부도 안 했다. 런던 가이드북조차 제대로 읽지 않고 왔다. 솔직히 파리가 주목적지였고 여긴 덤이었다. 그러면 안 되지만 6박을 함께했던 전 여친보다 3박을 같이 할 현 여친이 덜 매력적인 게 사실이다. 이상형은 누구에게나 있으니 잔소리는 하지 말아 주세요. 모든 소개팅에 늘 최선을 다하긴 어렵답니다.
영국 아니랄까 봐 날씨가 변덕스럽다. 런던 눈알 대기 중에 비가 쏟아졌다. 바람도 거셌다. 우비를 안 챙긴 내 탓이지 이 도시 탓은 아니다. 조금 전까지 화창했으니까 조금 후에는 그칠 거라고 기대하며 쫄딱 젖었다. 아니나 달랐다. 입장할 때쯤엔 비가 거의 그치고 구름 사이로 살짝 해도 났다. 이번 여친은 역시 소문대로 변덕이 심하다. 비위를 잘 맞춰드려야지.
웨스트민스터 다리 위에서 본 런던 아이. 관광객들은 눈알을 굴려 저기서 내려다 보고 여기서 올려다 본다
아, 정정할 것이 있다. 아침에 기차역 출입국이 까다로워진 것이 영국의 브렉시트 때문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전편 참고). 유로스타 옆자리의 아저씨와 후반 한 시간 정도 대화를 나눴는데 그가 정정해 줬다. 예전부터 그랬단다. 아무래도 영국에는 양질의 일자리가 많고 따라서 불법체류가 횡행하고 따라서 입국 보안도 까다로웠다고 한다. 정체를 캐보니 아프리카 코트디부아르 출신의 프랑스 국적자면서 영국에서 일하며 사는 분이었다. 모건 프리먼을 닮았다. 얼굴에 난 검버섯까지 비슷하다. 쇼생크 탈출 즈음의 나이로 추정된다. 60 언저리?
나는 이 지점에서 프랑스에 대해 말해 주는 프랑스인(지난 편 참고)을 만난 것 같아 매우 반가웠으나 곧 착각임이 밝혀진다. 서로의 직업(배달하는 일을 한댔는데 뭔지는 잘 못 들었다)과 여행 사유, 일정 등의 뻔한 얘기가 오가다가 내가 파리에 대한 동경을 늘어놓자 그가 어깨를 으쓱였다. 자기는 인종 차별이 없어 영국이 더 좋단다(프랑스가 싫은 건 아니지만이라는 단서가 달렸지만). 내가 놀라서 되묻자 프랑스에서는 알게 모르게 흑인의 한계가 있다고 한다. 영국은 유리천장이 없고 능력과 성과에 따라 톱이 될 수도 있다고 말했다. 헤어졌으나 좋은 추억을 가진 전 여친에 대해서 나쁜 이야기를 들으니 살짝 언짢았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내 것도 아닌 데다 그분이 더 잘 아는 것을...
프랑스의 시골 마을은 떠나는 나를 화창한 날씨로 배웅해 주었다
우리의 화제는 큰 화재가 되었는데 브렉시트로 옮겨 붙었기 때문이다. 자신은 30년 넘게 런던에서 일하고 있으면서 세금도 잘 내고 문제 안 일으켜 영구 비자를 받았지만 지금은 상황이 안 좋단다.
"영국 경제가 안 좋은 건 브렉시트 때문 아닌가요?"
라고 내가 묻자 자신은 찬성(pro)이 아니라 반대(against) 쪽이라며 아주 길게 영국 상황을 분석했다. 보리스 총리, 북아일랜드(UK면서 동시에 EU다), 불법 체류자들, 심지어 가짜뉴스 이야기도 했다. 하긴, 이유가 있으니 이유를 떠났겄지.
"당시 국민투표에서 가까스로 브렉시트가 이겼는데 순진한 시골 사람들이 불법 이민자들 문제를 심각한 걸로 알고 찬성을 던졌지 뭐야. 실제보다 부풀려졌어. 브렉시트파가 가짜뉴스를 퍼뜨린 거지. 대도시는 EU 잔류 희망이 압도적이었거든. 아무튼 현명하지 못했어. 지금 상황을 보라구. 얼마나 엉망인지.."
듣고 싶은 프랑스 얘기를 못 들어서 아쉬웠지만 그 여자는 떠나보내야 했다. 브렉시트에 집중하자!
"국민투표를 다시 할 수도 있습니까?"
"그런 주장은 계속 나오지만 쉽지는 않을걸. 이미 벌어진 걸 되돌린다는 건 아주 어렵지."
도버해협 터널을 빠져나오며 기차가 다시 밝아지자 대화주제도 밝아졌다. 아저씨가 코트디부아르 출신인 걸 그때 알았다. 그래서 불란서 얘기는 잘 안 했구먼..
"나라 이름의 어원을 알아요. Cote d'ivroire, coast of ivory 상아의 해안 맞죠?"
내가 상대방 고향에 대한 관심 표명인지 잘난 척인지를 했더니 다행히 좋아라 한다. 오, 너 관심이 많구나. 백인들의 상아 수탈 기지였다는 얘기까지 말하진 않았다. 겨우 밝아졌는데 말이지. 축구 선수 드록바 얘기도 꺼냈더니 그가 근황을 말해줬다. 은퇴 후 얼마 전에 고국에서 대통령에 출마했다가 낙방했단다. 축구는 잘하면서 정치는 헛발질인 셈이다. 지난 월드컵에서 한국팀의 졌잘싸, 감동이었다는 칭찬이 돌아왔다. 국뽕이 살짝 돋았다. 실력보단 운이었죠. 겸양을 떨어 국뽕을 눌러줬다.
헤어질 즈음 통성명을 했는데 아저씨와의 이름은 브록바였다! 오호라, 박 씨와 백 씨의 차이인가? 아무튼 그와의 대화에서 알게 된 것 하나. 남이냐 북이냐 묻는 것은 알고 묻는 게 아니다. 두 나라의 차이는 확실히 알지만 어느 쪽이 남인지, 북인지 즉, 방위를 묻는 것이다. 즉, 너는 당연히 자유국가에서 온 거 아는데 그게 노스냐 사우스냐? 그거였다. 김정은은 알지만 북인가 남인가 헷갈려하는 것과 같다. 아, 나는 그것도 모르고 그동안 살짝 불쾌해했었지 뭐야. 에이 설마 어딜 봐서 내가 북이냐, 라며 따지고 싶었던 거였다. 크게 깨달았다. 상대는 내 생각과는 다르다. 무조건 다르다!
숙소는 갈수록 좋아진다. 런던의 발전기는 심지어 독방이다
현여친과의 데이트를 마치고 체크인을 했다. 키와 함께 방 번호를 안내받았다.
"침대 번호는?"
"엥? 너 트윈룸 혼자 쓰는데(you don't share)"
오호, 이게 웬 횡재람? 코골이, 새벽 귀가, 귀찮은 자기소개, 일정 공유 따위에서 해방이다. 좋긴 한데... 창밖에 비는 오고 적막한 침대 속에서 한 시간 동안 이걸 쓰고 있자니 다소 허전하긴 하다. 여러 나라에서 온 친구들을 만날 기회가 여기서는 없겠군. 좋아, 그렇다면 런던에서의 3박은 고독 모드로! 기욤 뮈소 한 권은 다 읽고 가겠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