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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에나 Oct 02. 2019

촌스러운 걸 좋아하는 사람

소유의 취향#3. 나 역시도 세련됨을 추구하지만, 촌스럽다.




 조금 후져보이기도 하는 촌스러운 것들을 좋아한다. 최신 전자기기를 다루는 것도 즐겁지만, 빈티지한 옷이나 손 때 묻은 물건에도 마음이 잘 간다.



 빈티지 아이템의 매력은 자신만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언제 만들어졌는지. 얼마나 오래된 물건인지. 누가 썼던 물건인지. 답을 유추하는 과정에서 물건이 가진 특유의 분위기에 푹 빠져버린다. 내게 오기까지의 긴 여정을 상상하다보면 소유에 대한 만족감이 증폭된다.








 다양한 빈티지 아이템들 중에서도 내가 가장 좋아하며 수집하는 물건은 식기류이다. 특히 컵 종류에 환장한다. 우리 집에는 빈티지 컵이 꽤 많다.



 서울우유, 앙팡, 선키스트 등의 브랜드 로고가 박혀있거나 어린이용 미키마우스와 도널드덕 등의 캐릭터가 그려진 유리컵 세트, 각종 주류회사에서 만든 컵 등등. 촌스러운 디자인에 유리가 누렇게 변색이 돼서 손 때가 묻어있는 것 같지만 묘하게 매력적이다.

 




 사실 촌스러운 물건을 좋아하는 취향을 밝히기란 상당히 꺼려지는 일이다. 아주 비싼 명품 브랜드의 한정판 식기세트도 아니고, 그저 할머니네 집에 놀러 가면 찬장 구석에서 어딘가에서 뒹굴던 오래되고 낡은 컵을 좋아한다니. 정말 시시한 취향이라며 비웃음을 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얼마 전부터 세계적으로 뉴트로(New+Retro) 바람이 불면서 복고를 현대적인 분위기로 새롭게 즐기는 경향이 나타났다. 오래되고 촌스러운 디자인의 유리잔이 SNS를 타고 유행하며 거래되기 시작했고, 모던하고 세련된 매장 인테리어에 빈티지 잔들이나 식기를 이용해 음료와 요리를 대접하는 맛집들이 인기를 끌고 있다.



 이러한 열풍에 누구에게도 고백할 수 없던 나의 촌스럽지만 사랑스러운 취향이, 단숨에 트렌디하다고 잘난 척을 할 수 있는 취향이 되어버렸다.  ‘거 봐. 이래봬도 내가 좀 힙하다구!’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말하진 못했다. (난 부끄럼쟁이니까) 대신 “나중에 우리 집의 빈티지 그릇들도 돈이 될지 몰라. 버리지 말고, 기다려봐.” 라며 아빠와 언니에 의해 버려질 위기에 처한 컵들을 사수 할 수 있었다.



 뉴트로 유행은 허우대 좋은 핑계고 빈티지 컵들을 버리고 싶지 않다. 그 컵들에는 나의 어린 시절의 기억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기 때문이다.

 컵을 사용할 때면, 잠시나마 그때의 분위기나 기분에 젖는다. 커다랗고 뚱뚱한 유리병을 겨우 들어서 오렌지 쥬스를 조심스레 따라 마시던 어리고 작은 나의 모습이나, 쓴 가루 약을 잘 먹지 못하던 엄마가 요쿠르트와 섞어서 주던 풍경이 희끄무레하게 떠오른다. 마치 지금의 내가 유령이 되어 멀리서 지켜보고 있는 것 같은 기묘한 착각이 든다.


 바쁜 하루에 치여 사는 나에게 잠깐의 향수는 위로가 된다. 우유와 쥬스를 따라 마시던 컵에 이제는 커피나 술을 따라 마시다보니 야릇한 기분도 든다. 일탈하는 비행 어른이가 된 것 같다. 엄마가 발견하면 왠지 등짝을 때릴 것 같다. 혼자 아슬아슬한 기분에 실없이 웃고 만다.  


 가장 유아스러운 디자인의 빈티지 컵에 높은 도수의 보드카를 베이스로 갖가지 쥬스와 토닉워터를 섞어 칵테일을 만들어 마시면, 아이와 어른의 중반쯤에 서있는 것 같은 기분마저 든다. 아이처럼 순수하지만 어른처럼 자유로운 기분.




 며칠 전에는 저녁밥 대신 좋아하는 코카콜라 빈티지 컵에 캡슐커피를 내려 마셨다. ‘마시자. 코카 콜라’ 라고 조금 촌스러운 슬로건과 의미를 알 수 없는 기하학적 무늬가 가득하게 프린팅 된 컵이다. 얼음을 가득 담아서 시원한 아이스 아메리카노로 즐겼다. 힘든 하루의 마무리에 가장 좋아하는 컵과 음료를 마시는 것으로 스스로를 위로하고 다독인다.


 이 컵은 엄마가 유치원을 하며 학부모나 지인 모임이 활발히 이뤄진 시절에 자주 사용된 컵이다. 엄마와 엄마의 친구들은 이 컵에 프림 커피를 얼음과 섞어 차갑게 드셨다. 그 시절의 나는 달달하고 시원한 얼음 커피의 맛에 빠져버렸다. 엄마가 마시던 차가운 아이스커피의 마지막 한 모금을 얻어 마시며 즐거워했다.


 그때는 두 손으로 들어도 버겁게 느껴지던 크기의 유리컵이었는데, 지금은 한손에 딱 맞는 크기다. 나는 언제 이렇게 커버린 걸까? 촌스러운 컵을 좋아하는 내 안의 아이는 아직도 다 자라지 못한 것 같다.그때는 어른이 될 지금의 나를, 지금은 어린이였던 그때의 나를 부러워한다니 참 이상하기도 하다.



촌스럽지만 사랑스러운 도트무늬

 

감각적이고 세련된 신상품만이 사랑받는 시대임에도, 나는 여전히 어린아이로 머물러 있다. 촌스러운 걸 사랑하는 내 자신이 창피할 때도 있었지만, 이런 나의 취향을 부정하고 싶지는 않다. 모든 것들이 어지러울 정도로 빠르게 흘러가는 세상, 나라도 조금 느리게 머무르며 살고 싶다. 오늘도 나는 여전히 촌스러운 게 좋다.



PS. 부디 외양은 촌스러워도, 마인드는 세련된 사람이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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