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 속에서, 성과주의와 인력 유연화
조직이 구성원을 어떻게 바라보는지는 인사제도에 고스란히 드러납니다.
1997년 외환위기는 그 판을 크게 뒤흔들었습니다.
한국노동연구원의 조사에 따르면, 기업 열 곳 중 여덟 곳이 직원을 줄였고, 임금과 상여금 삭감은 일상이 되었습니다. 숫자는 차갑지만, 그 뒤에 남은 기억은 더 뚜렷했습니다.
"회사는 언제든 나를 내칠 수 있다."
그 후 인사제도의 나침반은 분명했습니다. 성과주의와 인력의 유연화.
평가·보상·육성·승진까지 성과가 기준이 되었고,
고용관계는 더 이상 단단한 담장이 아닌 필요할 때 열고 닫을 수 있는 문이 되었습니다.
연공서열은 힘을 잃었고, 동료는 함께 달려가는 동지가 아니라 비교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연봉제입니다.
개인의 성과와 능력에 따라 해마다 임금이 결정되는 연봉제는 도입률이 1998년 21.7%에서 2000년 78.3%로 급증했습니다. 비정규직 비율도 1997년 5.5%에서 1999년 8.7%로 상승했는데, 금융·보험업에서는 그 수치가 두 배 이상이었습니다. 성과급제, 목표관리(MBO), 인센티브 제도 역시 이 시기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그 결과, 무엇이 달라졌을까요?
2005년과 2015년 사이, 제조업 회사들의 인사지표는 분명한 흐름을 보여줍니다.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회사 오래 다닌 사람이 돈을 많이 받는다’는 공식이 약해졌다는 점입니다.
경력직 채용 비중은 21.2%에서 29.8%로 늘었습니다. 교육훈련비 비중도 1.5%에서 0.91%로 떨어졌습니다.
‘신입으로 입사 → 회사가 육성 → 승진’이라는 공식은 더 이상 보편적인 흐름이 아니게 되었습니다.
성과주의는 분명 효율성과 명확성을 가져왔습니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그림자도 짙었습니다.
2005년 이후 직원 몰입은 꾸준히 낮아졌고, 내부 인재 육성과 장기 개발 투자는 20% 가까이 줄었습니다.
과거와 달리 기업은 이제 인재를 길러내는 곳이 아니라 필요한 순간 적합한 인재를 찾아내 최대로 활용하는 곳이 되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회사와 개인은 흔들린 신뢰와 약해진 관계를 드러냈습니다.
* 출처: 한국노동연구원 (2018). 우리나라 기업 인사관리 관행의 변화추이.
기술 앞에서, 관계 맺는 법이 바뀌다
슬랙(Slack)으로 대화하고, 줌(Zoom)으로 회의하며, 데이터 대시보드로 의사결정을 내리는 풍경.
몇 년 전만 해도 낯설었던 장면은 이제 사무실의 일상이 되었습니다.
코로나 팬데믹은 이 변화를 하루아침에 현실로 밀어 넣었습니다.
재택근무, 화상회의, 원격 협업은 더 이상 실험이 아니라 오늘 당장 없으면 안 되는 도구가 된 것입니다.
변화를 이끈 건 팬데믹만이 아니었습니다.
2016년, 알파고와 이세돌의 대국은 ‘AI가 인간의 직관을 넘어설 수 있다’는 사실을 전 세계에 각인시켰습니다. 그리고 몇 해 뒤, 챗GPT는 단순한 보조가 아니라 실제 의사결정의 한 축으로 올라섰습니다. 코로나 팬데믹이 기술 도입을 앞당겼다면, AI는 기술 활용의 무게 중심을 바꿔 성과를 좌우하는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디지털 전환과 AI는 협업과 의사결정 방식 자체를 다시 썼습니다.
슬랙과 팀즈 같은 도구는 부서 중심의 소통을 과업 중심으로 옮겨 놓았습니다. 화상회의 화면에선 상석이 사라졌습니다. 모두의 얼굴이 같은 크기로 나열되면서 위계의 힘이 약해졌습니다. 상사의 직관보다 데이터를 근거로 판단하고 실행하는 문화가 자리 잡으며 권력의 지형은 흔들렸습니다.
조직이 구성원에게 기대하는 역량도 달라졌습니다.
정해진 일을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변화 속에서 빠르게 배우고 스스로를 새롭게 구성할 수 있는 능력—바로 ‘학습 민첩성(learning agility)’이 핵심 자질이 된 겁니다.
결국 디지털 전환과 AI는 단순한 도구 교체가 아니었습니다.
새로운 기술이 제대로 힘을 발휘하려면, 권한 배분부터 협업 방식까지 '관계의 규칙' 자체가 달라져야 했기 때문이죠. 그 과정에서 회사와 개인 간의 의무와 기대도 달라졌습니다. 회사는 지시를 잘 따르는 직원보다 스스로 배우고 변화를 만들어 내는 사람을 원하게 되었고, 직원들은 관리 대상이 아닌 성장 파트너로 대우받길 바라기 시작했습니다. 지시와 통제 중심이던 관계가 자율과 책임으로 옮겨가면서, 회사와 개인간의 새로운 심리적 계약이 쓰여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사회적 압력 속에서, 보이지 않던 약속이 드러나다
2010년대 후반, 법과 제도가 새로운 질문을 던졌습니다.
“일터란 어떤 공간이어야 하는가?”
2018년 도입된 주 52시간 근무제는 단순히 노동시간을 줄이자는 이야기가 아니었습니다.
'성과는 더 높이되, 시간은 덜 쓰라'는 시대의 명령이었습니다.
2019년 직장 내 괴롭힘 방지법은 관행처럼 여겨졌던 위계 중심 문화에 제동을 걸었습니다.
이제 조직은 더 이상 과거의 방식대로 구성원과 관계를 맺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수평적 소통, 고충 처리 시스템, 건강한 피드백 문화는 '있으면 좋은 것'이 아니라 '없으면 위험한 것'이 된 것이죠.
외부 압력도 거세졌습니다.
블라인드(Blind), 잡플래닛(JobPlanet) 같은 기업평판 커뮤니티는 조직 문화와 리더십을 실시간으로 검증하는 비공식 감시 시스템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구성원은 자신이 속한 조직을 외부와 비교하고, 그 경험을 곧바로 공론화할 수 있는 힘을 갖게 되었습니다. 평판 플랫폼은 기업의 일상을 낱낱이 비추는 거울이 된 것입니다.
이제 회사가 구성원에게 무엇을 기대하느냐만큼, 구성원이 조직을 어떻게 바라보느냐도 중요해졌습니다.
법과 달라진 사회 분위기는 조직과 구성원 간 관계의 기준을 다시 세웠고,
평판 플랫폼은 그 약속을 검증합니다.
심리적 계약은 더 이상 조직 안에서만 통용되는 암묵적 약속이 아니라, 사회가 지켜보는 거래가 되었습니다. 조직은 이제 구성원 앞에서 뿐 아니라 사회 앞에서도 자신의 약속을 지켜야 하는 시대를 맞이했습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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