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파주 출판단지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었습니다. 저녁 식사 시간에 맞춰 출발했는데도 토요일 저녁 막히는 도로 사정까지는 알 길이 없어 예정보다 도착 시간이 계속 늘어나고 있었죠. 집에 도착해 저녁을 준비해야 하는 시간까지 감안하면 저녁 식사가 많이 늦어질 것은 불 보듯 뻔한 상황이었습니다. 운전하는 남편의 옆자리에서 나는 머릿속으로 냉장고 속 재료를 떠올리며 가능한 한 빨리 준비해서 먹을 수 있는 메뉴가 무엇인지를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그즈음, 뒷자리에 앉은 아이가 불쑥 말했습니다. "오늘 저녁으로 라면 먹을까?" 내심 반가운 제안이었습니다. 남편도 그런 눈치였지만 둘 다 침묵하며 서로의 눈치를 보고 있었습니다. 우리 부부는 둘 다 라면을 좋아하기는 하지만, 한창 자라는 아이에게 라면을 먹이고 싶지는 않은 마음에 항상 아이가 라면 먹자는 제안을 할 때마다 선뜻 '그러자'라고 말하는 법이 없거든요. 그도 그럴 것이 우리 아이는 라면을 너무나 좋아합니다. 독일에 사는 동안 인터넷 검색을 해가며 그렇게 다양하고 많은 요리를 해 먹였는데도 누군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 무엇이니?"라고 물으면 1초의 고민도 없이 '라면이라는 대답이 나올 정도죠.
그날만큼은 라면을 먹는 게 여러모로 좋은 대안이었습니다. 우리 부부의 짧은 침묵에 아이는 얼른 덧붙였습니다. "우리 여행 갔다 돌아올 때는 항상 라면을 먹었잖아. 그러니까 오늘도 먹어야지." 긍정도 부정도 아닌 침묵을 깨고 '오케이' 사인을 받고 싶은 마음에 나름 생각해낸 부연 설명을 하며 노력하는 모습이 가상하더군요.
그 순간, 내 머릿속에 떠오른 것이 있었습니다. 물론 결과적으로는 라면을 먹게 될 것 같기는 했지만, 아이가 시작한 부연설명을 좀 더 해보게 판을 깔아줘 보면 어떨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와 함께 오래전 인터뷰 차 만났던 한 경제전문가의 사례도 떠올랐죠. 아이에게 어릴 때부터 경제교육을 시켜야 한다고 말씀하던 그분에게 그런 질문을 했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교육 방법을 쓰고 계신가요?"
그분은 말했습니다. 아주 사소한 어떤 것 하나도 그냥 사주지 않는다고. 사야 할 이유와 논리를 정확히 제시하면서 부모를 설득하게 만든다고. 그 설득이 통하면 사주는 것이고 실패하면 사지 못하는 것이라고. 당시 결혼도 하지 않았던 나는 생각했죠. 훗날 나도 이런 방법을 써보리라. 불필요한 소비를 줄이는 효과, 경제관념의 시작이라는 표면적 효과보다 과연 아이가 그 물건을 사기 위해 어떤 논리를 펼칠지 생각만 해도 재미가 있어지더군요.
그날을 떠올리며 나는 아이에게 제안했습니다. "좋아, 그러면 우리가 오늘 저녁에 왜 라면을 먹어야 하는지를 네가 한번 설득해봐. 엄마 아빠 생각에는 라면을 꼭 먹어야 하는 건 아닌 것 같거든. 그런데 또 먹을 수 있을 것 같기도 해. 그러니까 네가 우리 좀 설득해줘."
아이는 황당해했습니다. 그랬겠죠. 라면 하나 먹자는데 설득을 해보라니. 치사한 마음에 다 그만두자고 할 수도 있었겠지만, 나는 알고 있었습니다. 라면을 먹기 위해서라면 이 치사한 상황도 다 감수할 것이라는 걸. 미안하지만 아이의 그 애절한 라면 사랑을 이용하기로 한 것이죠.
독일에 살 때 가끔 테라스에서 끓여먹는 야채 듬뿍 즉석 라면은 '특별식'이었다.
한참을 생각하던 아이는 주절주절 뭔가를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라면은 맛있다, 우리는 맛있는 걸 먹어야 한다, 여행 후에는 라면을 먹었다, 오늘도 여행 중의 하나였다... 등등. 그쯤에서 설득당해줄 거였으면 애초에 그냥 오케이 했을 겁니다. "음, 뭔가 좀 부족한데? 그 정도 이유라면 꼭 라면이 아니어도 되지 않아?"
아이는 목소리에 눈물이 섞이기 시작했습니다. 억울할 때 울먹거리는 버릇이 있는데 그 상황도 무척 억울했던 모양입니다. 그즈음 상황을 눈치챈 남편이 살짝 힌트를 주었습니다. "지금 시간이 어떻게 되지?"
아이는 그 질문에서 '반짝' 아이디어를 얻었는지 전열을 다듬고 다시 논리를 펴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지금 7시가 넘었잖아. 내비게이션에 20분 남았다고 나오는데 주차장에서 올라가고 어쩌고 하면 집에 7시 반이나 되어야 도착할 거야. 그때부터 엄마가 저녁을 준비하려면 시간이 많이 걸리잖아? 그러면 너무 늦게 저녁을 먹어야 하니까 건강에도 좋지 않아. 그리고 나도 문제집 풀고 할 일이 있는데 밥을 늦게 먹으면 시간이 없어서 안 좋을 것 같아."
'설득의 상황'을 제시했을 때 기대했던 답이 드디어 나왔습니다. 남편과 나는 고민할 것도 없이 '좋아'를 외쳤죠. 그런데 그 순간 나는 이 상황을 좀 더 유머러스하게, 아이가 즐겁게 받아들이도록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결과적으로 아이가 원하는 라면을 먹게 됐으니 그걸로 만족했을지는 모르겠으나 이 상황 자체에 대한 기억을 힘들고 까다로운 상황이 아닌 재밌었던 일화로 기억하게 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하여, 나는 덧붙였습니다. "와, 너무 잘했는데! 그런데 사실 엄마는 이런 답을 원했어. '엄마, 내가 사랑하는 엄마가 저녁을 준비하느라 너~무 힘들잖아. 내가 라면을 좋아해서 먹자고 하는 게 아니야. 엄마가 저녁 준비하는 고생을 안 하도록 그래서 제안한 거지 절대로 내가 먹고 싶어서 그런 건 아니야'라고 말이야."
듣고 있던 아이는 깔깔깔 웃어대기 시작했습니다. 그 웃음 속에서 나는 '다음번엔 저런 식으로 써먹어야지' 하는 아이의 깨달음을 읽었던 것도 같아요.
라면 먹는 것 하나로 그렇게 우리는 꽤 오랜 시간을 즐겁게(아이는 즐겁지 않았을지 모르지만) 이야기했습니다.
생각이라는 것은, 생각이 자라는 과정은 그리 거창한 것이 아니라고 믿어요. 라면 먹는 일 하나로 아이는 어떤 생각을 하고 그 생각을 어떻게 말해야 하는지, 심지어 그 상황을 유머러스하게 풀어가는 방법도 배웠을 겁니다.
그로부터 일주일이 지난 뒤, 아이와 단둘이 외출에서 돌아오던 길에 아이가 말하더군요. "엄마, 우리 집에 가서 라면 먹을까?" 나는 눈을 흘기며 말했죠. "무슨 라면이야?" 아이는 내 등을 토닥이며 눈빛을 반짝였습니다. "엄마, 내가 설득해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