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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P Feb 10. 2023

산책

의식의 흐름으로 글 쓰기

해가 길어졌다. 해가 길어지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해가 길어지면 수영을 하는 날이 많아질 것이다. 수영을 하다가 숨을 잃어버릴 것만 같은 순간도. 수영을 하다가 물 속에서 무언가를 줍는 날도. 겨우내 산책을 많이 했다. 산책을 할 때는 종종 밭가를 기웃댄다. 길 잃은 브로콜리나 귤을 주우려고 허리를 굽힌다. 얼마 안 하는 것들이지만 왠지 내가 재배한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수확 과정에 손을 댄 것 같은 기분. 오늘은 작은 한라봉을 주웠다. 껍질이 두껍고 마른 한라봉이었다. 속껍질도 두껍고 질겼다. 하지만 상상 이상으로 달았다. 질기고 쪼글거리지만 수분이 날아간 한라봉은 달았다. 남은 수분은 모두 속 껍질 안에 웅크리고 있었다. 그것은 예상치 못하게 길어진 산책에 물을 뿌려주었다. 오늘의 날씨는 맑음. 수 키로나 가벼운 발걸음으로 걸었다. 지나가다 만난 건 귤밭과 귤 택배를 내걸은 컨테이너 가게. 산책은 언제나 보장된 행복을 준다. 어디든지 내려 걸으면 사소한 행복을 주워갈 수 있다. 브로콜리나 귤을 찾지 못한 날에도, 손에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날에도 산책은 산책 그대로 의미가 있다. 목적지를 잊고 걷는 일이 산책의 일이다. 버지니아 울프는 산책을 많이 했다는 사실을 산책할 때마다 상기한다. 하루에 8시간도 걸었다고 했다. 나는 두시간이면 산책을 그만 두고 맛있는 과자에 커피를 먹고 싶은 충동이 커진다. 그럴 때는 입 안에 단 맛이 맴돈다. 달고 쓴 맛, 따뜻한 커피의 맛이 맴돈다. 맴돌아서 당장 그것을 현실화 시키지 못하면 안 될 것 같다고, 매 순간 의식하며 걷는다. 입과 발은 각자 다른 일을 한다. 뇌는 음식을 생각하더라도 발은 여전히 걸을 수 있다. 눈은 발을 따라 간다. 뇌와 가장 가까운 곳에 있지만. 발을 따라 가며 햇빛 그림자 같은 것이나 귤의 주황이 얼마나 선명한지, 스치는 나무들이 얼마나 아름다운 가지를 가지고 있는지를 담는다. 그것은 뇌의 영역이겠지만 단맛을 머금은 뇌의 영역이 아니기도 하다. 단맛과 아름다움이 싸운다. 뇌 속에서. 발과 입이 싸운다. 그래서 나는 두시간을 잘 못 넘긴다. 산책을 할 때. 창문에 김이 서린 카페로 쏙 들어가 자리를 꿰차고 앉아서 무언가 주문한다. 뜨거운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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