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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차의 딜레마

세상이 제 뜻대로 흘러가지 않아도 살 사람은 살아야지

by 심색필 SSF

세상을 살다 보면 정말 이 절차란 것 때문에 화딱지가 날 때가 많다.


“저... 문의를 드릴 게 있어서 왔는데요?”

“일반 문의는 중앙 상담구 통해서 말씀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저벅. 저벅.-


“어떤 용무로 오셨죠?”
“문의를 드리려고 하니까 이쪽으로 오라고 하더라고요.”

“아... 우선 상담 신청서부터 써주시겠어요?”


-저벅. 저벅.-


“상담 신청서를 쓰려고 왔는데요.”

“아... 주민등록증이나 운전면허증 보여주세요.”

“여기요.”


-째깍. 째깍.-


“아... 저희 지점은 처음이시네요.”
“네.”

“그럼 신청서를 쓰시기 전에 가입서를 다시 써주셔야 하는데...”

“어디서 쓰면 되나요?”

“이거 서류 작성해 주시고 다시 번호표 뽑고 와주세요.”


-끄적끄적.-


“네. 여기 있습니다.”

“아... 오늘은 업무시간이 끝났는데 다음에...”


완벽하지는 않지만 다들 이런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을 것이다. 다들 자기 관할이 아니라고 하며 책임을 피하기 위해 폭탄 돌리기를 하듯 여기저기 사람을 돌리는 그런 장면. 영화나 드라마에서 보다 현실세계에서 훨씬 더 자주 마주할 수 있는 장면들이다. 순간적으로 온몸에 있는 피가 역류해 세상이 벌겋게 보이는 충동이 들게 만드는 그런 일들이 생각보다 훨씬 더 자주 일어난다.


“죄송해요. 저희도 절차라는 게 있어서요.”


‘씨발.’


-두. 두. 두. 두. 두.-


대한민국에 총기규제가 강하다는 건 정말 다행인 것 같다. 안 그래도 불같은 성미를 가진 민족에게 총기가 쥐어지면 엄청난 대혼란이 올 것이다. 도덕적으로 그러면 안 된다는 걸 알지만 마음속으로는 수십 번 피에로 화장을 하고 미친놈처럼 날뛰는 상상을 해보게 된다.


"서로 화내고 소리 지르고! 예의라고는 전혀 없어! 상대에 대한 배려가 전혀 없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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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조커' ]


폭력을 정당화할 순 없지만 정말 부아가 치밀 때가 있다.


"도대체 무슨 정신으로 저러는 거지?"


속으로 수많은 육두문자들이 터져 나오지만 정작 입 밖으로 그 말을 뱉어내지는 않는다. 정확하게 말하면 못하는 거지.


「 강남 XX지점 욕설남. 」


화를 참지 못하고 소리를 지르는 순간부터 모자이크가 된 내 모습은 전 세계에 까발려질 테니까. 어쩌면 공인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내 얼굴이 모자이크가 안된 채 누군가의 SNS에 오르락내리락할 수도 있다. 그리고, 이상한 댓글들이 붙겠지.


“나 저 사람이랑 같은 학교 출신인데 원래 좀 문제 많았음.”

“하아... 어쩌다 저렇게 됐을까? 저 정도는 아니었는데.”

“혹시 XX고?”

“어? 3학년 12반?”

“반갑다. 친구야.”


날 씹는 글들에서 어이없는 동창회가 이뤄질 수도 있겠지. 그 가능성도 희박하겠지만 말이다. 왜냐하면 대부분이 익명이라는 제도 뒤에 숨어 폭언과 비아냥, 그리고 증빙되지 않은 이야기들을 사실처럼 떠벌리는 세상이 되었으니까. 그래서 그런가 우리는 생각보다 당당하게 불의에 대해 입을 열기 어렵고, 생각보다 그런 소심함 덕분에 절차라는 제도 뒤에 숨어 태업을 하는 사람들이 느는 것 같다.


“죄송합니다. 저희 규정상 그리고 절차상 그건 불가능합니다.”

“어떻게 안될까요?”
“저희도 시스템은 어떻게 바꿀 수가 없습니다.”


답답하기는 하지만 정말 어쩔 수가 없다. 사실 절차라는 게 어떻게 보면 정말 중요하다. 옷을 입을 때도 속옷을 입고 바지를 입지 바지를 입고 그 위에 속옷을 입지 않는다. 음식을 만드는 것도 저마다의 과정이 있고, 그 음식이 장사하는 음식이면 각 업체들만의 절차는 더더욱 중요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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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드라마 '파스타' ]


“여기 등도 따야지.”

“아.. 급.. 급해서...”

“급해서? 그게 새우 탓인가? 그게 새우 잘못이야?”

“죄송합니다. 셰프.”

“뇌에 칼집 내줄까?”


드라마 파스타에서도 급하다는 이유로 새우 등을 제대로 따지 않는 모습에 극대노하는 셰프의 모습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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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드라마 '미생' ]


“내 얘기 똑바로 들어. 우리가 지금 하려는 일은 사실관계를 밝히려는 거야. 절차대로 진행된 일인지. 결과적으로 좀 무리한 계약이었다고 해도 업무 당사자의 스타일 상 그냥 넘어갈 수도 있는 부분이라고. 중요한 건! 절차를 제대로 지켰느냐야.”


드라마 미생에서 나오는 한 장면이다. 사실 회사에서 일을 하거나 이런저런 일을 하다 보면 절차라는 단어는 떼려야 뗄 수 없는 단어이다. 모든 일이 행복하게 다 잘되면 대부분 문제가 없지만 대부분의 일들을 삐걱대면서 어쨌든 결승점을 향해 나아간다.


“필요한 서류가 좀 많기는 하죠?”

“뭐... 그래도 저번보다는 조금 간소화되었네요.”


하나의 일에도 서로 간의 책임소재를 하나하나 따지기 위해 불필요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많은 필요 서류들을 일일이 다 서면으로 뽑아 제출할 때도 있고, 저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을 정도로 꼼꼼하게 계약서에 도장을 찍을 때도 있다. 혹여나, 정말 손톱만 한 만일의 문제라도 발생하지 않기 위해서. 그럼에도 항상 사고는 터진다.


“어떻게 된 거예요?”

“그게 사고가...”


그렇게 차곡차곡 쌓아 올린 서류종이들은 순식간에 이면지로 전락해버리거나 파쇄된 종이로 왕만두 속처럼 재활용 쓰레기통을 꽉 채우기도 한다. 그동안의 그 노력들이 헛수고가 되는 모습을 눈앞에서 보는 것처럼 허망한 기분이 들 때가 없다. 아마, 인어공주 원작의 공주가 물거품이 되는 게 저런 느낌이려나 싶 듯 말이다.


“살다 보면 과정보다 결과에 더 집착할 수밖에 없는 것 같아.”


요즘 그런 생각을 좀 많이 한다. 수많은 절차를 지켜서 한 사업을 이뤄내는데 그렇게 많은 인증시스템을 지킨다고 과연 결과가 다 좋을까? 우리 모두가 3스타 레스토랑 셰프가 될 수는 없는데 왜 실질적인 일을 하는 것보다 절차를 지키기 위한 서류 작업에 더 많은 에너지를 쏟는 건지 의아할 때가 많다.


생각해 보면 절차라는 건 갑의 특권이자 강자가 손에 쥐고 있는 목줄 같다.


“자. 우리 절차대로 다 계약서에 서명하고 다 했잖아요. 이거 제대로 안 하면 그 다음은 알죠?”


토끼사냥을 한다고 해서 기꺼이 목을 내주었지만 눈앞에 있는 것은 멧돼지나 호랑이 일 때가 태반이고, 사냥이 무서워 꼬리를 내리면 눈앞에는 팔팔 끓는 가마솥이 날 기다리고 있다. 도망칠 수 없게 문자의 족쇄를 만들어 우리 스스로를 옳아 메기 위한 절차를 우리 스스로 걸어가고 있을 때가 많은 것 같다.


“야... 그래도 그 절차가 너 지켜줄 때도 많아. 절차 안 지키는 놈들은 솥이 아니라 호랑이 보자마자 너 버리고 도망갈걸?”


하긴... 호랑이를 보고 총을 들 수 있는 인간들이 대부분 그 절차를 잘 지키려고 할 것이다. 절차를 안 지키는 놈들은 고라니만 나타나도 쫄아서 도망칠 수 있다. 홀로 고라니를 잡으면 내게 떨어지는 건 고깃덩이가 아니라 사료 부스러기나 던져주고 도망친 자신은 나중에 바빴다는 척 너스레를 떨며 슬금슬금 다가오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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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배트맨 vs 슈퍼맨' ]


“그런데... 바지 위에 팬티 입는 인간들은 진짜 강한 놈들 아니냐? 슈퍼맨이랑 배트맨 같은 히어로들이잖아.”

사실, 진짜 강한 놈들은 절차 같은 거 신경도 안 쓰겠지? 그게 진짜 강자 아닐까?


“아... 오늘 입맛이 없네요. 셰프님. 앞에 나왔던 코스랑 뒤에 나오는 코스 대접에 넣고 비벼주세요.”

그런 강자들은 3스타 레스토랑에 가서도 모든 코스를 섞어 비빔밥처럼 먹는 미친 짓을 할 수 있지 않을까? 뭐... 맛은 보장 못하겠지만... 혹시 모르잖아. 진짜 맛있을 수도. 뭐... 그렇게 돈이 많아 봐야지 경험할 수 있을 것 같기는 한데 아마 그런 짓거리를 하면 대중이라는 강자한테 다시 짓밟힐 것 같기는 하다.


「 XX기업 재벌 3세. 3스타 레스토랑에서 비빔밥 민폐남으로 등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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