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만 하자. 하나만....
작년 이 맘때쯤에 우연히 무슨 일을 하게 되었다. 후각에 대한 걸 시각적으로 표현해야 하는 작업들. 뭔가 조금 어려우면서도 재밌었다. 새로운 이야기를 쓰고 싶었고, 새로운 시나리오를 적어내고 싶었다.
‘향기의 시선’
작년에 쓰고 있던 에피소드들을 단편, 중편으로 쓰고 있던 글이다.
「 2달 뒤에 돌아오겠습니다. 」
이 말을 남기고 현재 반년이 지나간 것 같다. 짧은 단편이나 그나마 엉덩이를 붙이고 집중해서 적었던 중편의 글을 쓰고 나서 장편의 이야기를 하나 작필하고 있었다.
“잘 안 써지네.”
개인적으로 글을 쓰는 걸 좋아한다. 전문적으로 배워본 적도 없고, 사실 전공도 지금 하는 일과는 거리가 매우 멀다. 심지어, 이전에 했던 일들과 평상시 성격과 성향과는 전혀 다른 작업. 그러나, 글을 쓸 때면 뭔가 평상시에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세계에 발을 들이는 느낌이다. 아무도 깨지 않고, 아무도 존재하지 바다처럼 거대한 호숫가에 떨어져 혼자 그 앞을 바라보고 있는 느낌이다.
-똑.-
그러다, 무언가 머릿속에 조그마한 물방울 하나가 떨어지면 잔잔하면서도 거대했던 그 호수는 어느새 약한 파동을 만들기 시작하고 점점 큰 파도가 일어나며 결국 거대한 태풍이 머리를 잠식하는 느낌이 든다.
“넌 왜 이렇게 집중을 못하니?”
사실, 어렸을 때부터 집중력이 안 좋았다. 정말 안 좋았다. 가만히 앉아있지를 못하는 엉덩이가 가벼운 그런 아이. 뭐 흔하게 ADHD라고는 하지만 내가 어렸을 때는 그런 단어가 없었다. 당연히 치료를 하거나 고쳐보려는 노력은 없이 그냥 ‘집중력이 약한 아이.’라는 말로 머릿속에서 계속해서 뻗어 나는 나뭇가지를 질타하기 바빴다.
“어떻게 그런 병신 같은 생각을 할 수가 있냐?”
아마 처음 글을 쓰기 시작한 건 그런 말을 들었을 때인 것 같다. 병신 같은 생각. 조금 말이 거칠고 투박할 수는 있지만 개인적으로 수많은 상상은 정제되지 않은 망상에서 시작되는 것 같다.
열매가 처음부터 그 자리에서 자라나는 게 아니듯, 비닐하우스처럼 규격화된 세상에서 모든 근원이 시작된 것이 아니 듯 휘몰아치는 거센 바람에 날리고, 거친 파도에 이리저리 치이다 결국 어딘가에 자리를 잡고 싹을 틔운 것처럼 모든 생각은 척박한 상상에서 시작되는 것 같다.
“아... 이거 좀 재미없는데?”
처음에는 내가 재밌어서 썼던 글들이 쓰다 보면 정말 너무 재미가 없어질 때가 많다. 갈피를 잡지 못하고 줏대 없이 흐느적거리는 캐릭터는 내가 쓴 소설 위에서 놀고 있는 등장인물이 아니라 나일 때가 훨씬 더 많다. 앞뒤가 하나도 맞지 않고, 당연하게 여겨져야 할 것 들을 지키지 않는 그런 글들.
“다시 써야지.”
지금까지 끝맺음을 한 친구들보다도 단단하고 메마른 지면을 채 뚫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스러져간 이야기들이 훨씬 더 많다.
“난 생각보다 더 멍청할지도...”
무언가에 대한 자극이 없고, 그에 대한 영감을 받지 못하면 생각은 이내 꽉 잠긴 수도꼭지처럼 막혀서 물 한 방울조차 쉽게 떨어지지 않는다. 머릿속을 넘실대는 그 수많은 생각들이 다 재미없고 하나부터 열까지 다 거기서 거기 같은 이야기들. 그럼에도 글을 쓰고 싶다. 그냥, 내 이야기를 막힘없이 쓰고 싶은데 그건 생각보다 쉽지 않다. 왜냐하면, 대부분은 잘 쓰이는 글들은 간접적인 눈으로 본 이야기니까.
“와... 이거다. 날아가기 전에 좀 써야지.”
난 대부분의 이야기들을 꿈에서 가져올 때가 많다. 이런저런 사업들을 하면서 가장 많이 듣는 이야기는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무언가.’, ‘상대방의 Needs를 찾아라!’ 이런 이야기들이지만 개인적으로 그런 글들을 획일적으로 쓰는 건 그냥 나 스스로가 공장으로 전락하는 게 아닌 가 싶다. 물론, 쓰고 난 대부분의 글들이 완전 오리지널이었던 적은 한 번도 없지만 말이다.
“오늘 꿈은 좀 신박했는데. 그래도.”
난 영감의 7할 정도를 꿈에서 얻는 편이다. 물론, 너무 단편적인 이미지가 지배적일 때가 있지만 마치 누군가가 자신의 세상을 보여주려는 듯 꽤나 그럴듯한 이야기가 흘러나올 때가 있다. 다른 곳에서는 올리지 않고 공모전에서만 올렸던 글들이 대부분 꿈에서 시작된 이야기들이다. 그런 글들을 처음 시작할 때면 손가락이 쉬지 않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무언가를 생각해 내고 창조하는 느낌이 아니라 그냥 내가 봐왔던 그런 장면들을 기억 속에서 소실시키지 않으려고 끊임없이 기록하는 듯 한 그런 느낌이다.
-다.다.다.다.다.다.-
-쏴아아아아아아.-
비가 거세게 오는 날, 세상을 적시는 빗소리에 타이핑 소리가 장단을 맞출 때가 있다. 머릿속에 자그마한 물방울 하나가 떨어지는 그런 날이 아니라, 폭풍처럼 거센 물줄기가 앞이 보이지도 않고 쏟아질 때. 비가 오는 날에 오히려 바다가 더 얌전하고 잔잔하듯이 그런 날은 오히려 더 머릿속이 평온해지는 느낌이다.
'억수같이 쏟아지는 비에도 바다 표면은 물결 하나 일지 않고 조용했다.
두들기는 빗소리에 점이 생길 뿐 더 일렁이는 파도는 없었다.'
조종 이런 기분이 드는 날이 있다. 그럼 그날은....
“그냥 쓰기만 하면 돼.”
정말 그냥 쓰기만 하면 된다. 명확하게 결승점이 있는 듯한 느낌이다. 사실, 그런 느낌이 좋았다. 무언가에 몰입할 수 있는 그런 순간이 있는 느낌. 살면서 운동할 때를 제외하고는 그런 느낌을 받아본 적이 거의 없던 것 같다. 사람들이 거의 없는 그런 날. 조용한 수영장에서 고요하게 수영을 할 때의 그 느낌. 손바닥이 수면을 때리는 소리. 손을 잡아당길 때 느껴지는 물이 버팅기는 소리. 하나, 둘 박자에 맞춰 발을 찰 때마다 통통거리며 물이 터지는 소리 등. 그냥 그 자체에 집중할 수 있는 순간이 그렇게 많지는 않은데 글을 쓸 때 한 번씩 그런 느낌을 받는 것 같다.
-위이이이잉.-
외국에 있는 친구들에게 한 번씩 답장을 하면 이런 말들이 날아온다.
“뭐야? 왜 이 시간에 깨있어?”
“이때가 집중이 잘돼.”
모든 사람들이 깨있는 해가 뜬 시간에는 느끼지 못하는 고요의 순간들이 있다. 새벽 2시를 넘겨야지 느낄 수 있는 적막들. 빛마저 없다면 우주에 아마 나 홀로 떨어진 느낌이겠지. 그럴 때 오히려 집중이 더 잘 되는 것 같다. 시끄러운 세상의 소리에 맞춰 떠오르는 이런저런 잡념들이 정리되는 느낌이다. 더럽혀진 책상이 자연스럽게 다시 제자리를 돌아가 질서를 맞추는 것처럼 모든 생각들이 자연스럽게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는 느낌이다.
“하... 뭐야? 도대체 뭘 쓴 거야?”
그럼에도 다음날 다시 글을 읽어보면 입에서 저런 말이 나올 때가 더 많다. 이게 내가 쓴 글이 맞나 싶을 정도로 말도 안 되는 글들을 보면 사회에 녹아든 규격화된 시선으로 여기저기 흐트러진 글들을 다시 재조립하기 시작한다. 아마, 그 괴리의 순간들이 모여서 며칠 뒤에 “하아... 다시 써야겠다.” 이런 말을 하게 되는 것 같다.
아무리 광산에서 좋은 원석들이 쏟아져 나온다고 해도 결국 그 원석을 보석으로 가공하는 능력이 없다면 제대로 된 부가가치를 낼 수가 없다. 지금 내가 해야 할 일이 채굴이 아니라 세공임을 알고 있으면서도 섬세한 이 작업들은 여간 까다로운 게 아니다. 내가 만든 세상의 신이 돼서 이 친구들의 운명을 조금 더 그럴듯하게 만들어줘야 한다. 한 캐릭터가 싫다고 그를 계속 구렁텅이로 빠뜨릴 수도 없고, 다른 등장인물에게 마음을 내주어 그에게만 행운을 내어줄 수도 없다.
어떻게 보면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도 누군가가 쓴 소설이라고 생각하면 그 ‘누군가’는 이야기의 족쇄 때문에 꽤나 공평한 세상을 만들고 있지 않을까 싶다.
“공평하기는... 그럼 얘는 왜 이렇게 힘든 상황에 빠지는데?”
“주인공이니까. 이겨내야지.”
누구가 힘든 삶을 살고 있고 지금 이 순간이 힘들다면 아마 그건 ‘누군가’가 쓰는 이야기의 주인공이 아닐까 싶다. 고난을 이겨내고 극복해야 진짜 주인공의 서사가 만들어지는 것처럼 말이다.
‘천재.’
‘괴물.’
‘타고난 운빨의 인간.’
‘선택받은 회귀자.’
‘초능력자.’
사랑을 받은 엄청난 능력자들이 있겠지만 아마 그들이 모든 이야기의 주인공이 아닐 것이다. 삼국지의 주인공이 누군가에게는 ‘조조’였고, 누군가에게는 ‘제갈량’이며, 누군가에게는 짧게 등장하는 '화타'인 것처럼.
[ '신의 화타 사당.' ]
흠...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내일 이 글을 보면 무슨 생각이 들까? 한참을 방황하던 소재에 다시 집중을 하기로 했는데... 과연 할 수 있을까? 내 스스로가 가장 미스터리이고 가장 의문이다. 지금 새로운 세상과 스토리를 쓰는 나도 ‘누군가’의 소재 중에 하나려나? 흠.... 아님 말고.
제때 잠을 자도 새벽에 눈이 떠지네... 아침에 다시 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