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은 여유의 자리였다.
커다란 캐리어를 두 개 준비했다. 넉넉했다.
선물을 넣어 올 자리가 있을 정도로.
물론 내 손에 들릴 핸드백과 짝꿍의 분신인 노트북 가방과 카메라에 뭐 몸에 주렁주렁 달고 다닐 다른 것들이 있기는 했지만 공식적으로 여행 캐리어는 두 개뿐이었다. 캐리어 지퍼를 이렇게 여유롭게 잠가본 적이 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싱그러운 연둣빛이 가득한 4월이라 제법 여러 날 동안 떠나는 여행이었지만 옷이 단출했다. 일교차가 좀 있어 긴 옷을 조금 챙기기도 했지만 캐리어 안에 옷의 자리는 크지 않았다. 그리고 약간의 주전부리와 구급약품, 여벌의 신발의 자리도 여유로웠다. 짝꿍과 나 단 둘이 떠나는 여행이라 짐이 4인분에서 2인분으로 줄었으니 당연한 거라고 생각을 했었다. 그러나 짐을 챙기는 동안 나는 금세 알아차렸다. 단순히 여행을 떠나는 사람의 수의 차이가 아니라는 것을. 아이들과 함께 가는 여행에서는 짐이 참 많았다. 아이들이니까 여벌의 옷도 많이 필요했고 아이들이라 필요한 물건들도 있었으니 짐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집으로 돌아와서 짐을 풀 때 보면 한 번도 쓰지 않은 물건과 입지 않은 옷들이 꽤 있었다. 왜냐하면 혹시나 필요하면 어떡하지라는 부모의 걱정에서 비롯된 예비짐들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햇살이와 요술이가 초등학생이 되었을 때 작은 캐리어를 하나씩 사 주고 그 안에 여행에 필요한 개인짐을 챙기도록 했다. 처음 자신의 캐리어를 가졌을 때 아이들은 엄청 들떠 신나 했었다. 스스로 캐리어를 끌고 간다는 것 자체로 어른이 된 것 같다며 좋아했었다. 덕분에 캐리어의 숫자가 좀 많아지긴 했지만 각자의 짐을 챙기는 습관에는 좋았던 것 같다. 아이들이 짐을 챙기는 걸 보면 참 재밌기도 하고 답답하기도 했었다. 정말 이사를 가는가 싶을 정도로 캐리어를 꽉 꽉 채웠기 때문이다. 꼭 필요한 옷과 장소에 필요한 놀거리들 외에도 평소 가지고 노는 잡다한 놀잇감에 미술도구까지 참 알차게도 챙기곤 했었다. 내 눈에는 정말로 필요하지 않은 것 같은 많은 것들이 챙겨졌다. 햇살이와 요술이가 1차로 짐을 챙기면 나와 한참을 옥신각신 이야기를 하며 짐을 줄이고 줄이는 과정을 거쳤다. 지퍼가 잠길 정도는 되어야 끌고 다닐 수 있으니까 말이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면 짐을 챙기는 것에 대한 옥신각신 이야기는 나에게도 필요했던 것 같다. 나의 역할이 부모이다 보니 예상치 못한 상황에 필요한 무언가를 챙겨 대비하려 짐에 짐이 더해졌던 것이다. 보부상도 아니고 참 뭐람. 그래도 나는 '너희들은 어렸고 난 희박하지만 필요할 수 있는 확률이 있는 물건만 챙겼다고' 한번 항변을 해 보고 싶긴 하다.
뭐 빠진 거 없어? 허전한데...
없으면 없는 대로... 뭐 어때? 애들도 없잖아. ㅋㅋ
캐리어에 짐을 챙기면서 허전하다니. 생소한 감정이었다. 이런 거구나. 아이들이 없는 둘만의 긴 여행은. 짐만 허전해야 할 텐데 설마 마음까지 허전하진 않겠지. 대차게 양육졸업여행을 떠나겠다고 선언해 놓고 설마 아이들이 옆에 없는 것에 허전해하고 낯설어하고 있는 건가. 아님 아이들을 두고 둘 만의 여행에 너무 기뻐하면 아이들이 서운해할까 봐 아닌 척을 하는 건가. 참 이상한 감정들이 스친다. 어쨌든 캐리어에 짐을 다 챙기고도 남은 빈자리가 반가웠다. 우린 빈자리에 선물들을 가득 채워 오기로 했다. 아이들을 위한 액세서리와 주전부리도 사겠지만 우린 더 시급히 채우고 싶은 선물이 있었다. 우리 둘을 위한 선물. 바로 알딸딸하게 기분을 달뜨게 하는, 오랫동안 오크통에서 숙성된 채 코박죽을 하게 만들고야 마는, 황홀한 짙고 옅은 갈색의 액체. 술이다. 이탈리아를 다녀온다고 하니 지인들은 이탈리아 장인이 한 땀 한 땀 정성스럽게 만든 가방을 꼭 사 오라고 했다. 그런데 난 가방을 들고 다니지 않는 삶을 지향하는 사람이라 가방을 살 생각은 전혀 없다. 난 그 보다 술이 좋다. 가방은 혼자 즐기는 거지만 술은 둘이서 혹은 여럿이서 즐길 수 있는 시간을 가져다주는 것이라 난 이게 더 좋다.
미리 말을 하자면 우린 캐리어의 빈자리에 나와 짝꿍을 위한 진한 알코올과 알코올과 함께 할 이탈리아의 주전부리와 알코올을 따라 마실 로마라고 적힌 2개의 술잔, 마지막으로 향수를 채워왔다. 또 햇살이와 요술이를 위한 쿠키, 사탕, 초콜릿, 장인의 손거울, 이탈리아 상징물로 만들어진 키링 등을 채워왔다. 줄어든 짐만큼의 캐리어 자리는 선물을 위한 자리인 것 같지만 실은 걱정을 당겨하지 않는 그 가벼워진 마음의 자리였다. 여유의 자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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