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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처음부터 잘 키우자 Sep 13. 2024

노란선이 가 닿은 곳

온통 초록빛이었다.

비행기 안 좁은 공간에서 가장 눈에 띄는 건 앞 의자 등받이에 자리를 잡고 나를 바라보고 있는 네모난 패드였다. 패드의 화면에는 인천에서부터 로마까지 노란선이 그어져 있었다. 비행기가 '넌 지금 여기를 날고 있어.'라고 말해 주는 것 같았다. 한 뼘도 채 안 되는 노란선을 보고 있자니 언제 도착하려나 하는 즐거운 지루함이 상상되는 설렘이 느껴졌다.


와인을 곁들인 두 번의 식사를 하고 한 번의 간식을 먹고 책을 보다 영화를 보다 자다 깨다를 반복하는 사이 시간은 거꾸로 거꾸로 흘렀다. 시간이 거꾸로 흐르는 사이 노란선이 눈에 띄게 줄어 있었다.  그리고 나와 짝꿍을 태운 비행기는 중국과 몽골 국경 어딘가를 지나고 카자흐스탄의 하늘을 날아 카스피해를 건너고 흑해를 지나고 있었다. 잠시 후의 즐거움과 기쁨 그리고 낯선 시간의 흔적에 대한 기대감이 보글보글 끓어올랐다. 아마도 눈에 보이는 시간은 오후일 테지만 나의 몸은 새벽을 느끼고 있을 것이다. 보이는 시간과 느끼는 시간 사이의 부조화 속에서도 나는 분명 행복할 것이다.


점점 짧아지는 노란선을 따라 어둠이 몰려오고 있었다. 지구가 자전을 하고 있으니 당연한 거겠지만 난 자꾸만 신기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점점 더 마음이 편안해지고 있었다. 왜냐하면 아이들이 있는 인천의 우리 집이 어둠 속에 파묻혔기 때문이었다. 아이들이 집에서 가만히 잠을 잘 거라는 사실 때문이었다. 비행을 하는 동안은 연락도 못하는데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어쩌나 하는 내 머릿속 한켠에 자리를 잡고 있던 걱정의 스위치가 꺼진 것이다. 걱정이 빠져버린 그 휑한 곳에서는 새로운 궁금증이 생겼다. 비행기 안에 가득한 어둠과는 다른 비행기 밖의 밝음에 대한 궁금증말이다. 그러나 막상 창문을 열자니 어둠이 가득한 비행기 안에 새어 들어올 빛이 너무 부담스럽고 어색할 것 같았다. 그래서 사람들이 쳐다보면 좀 웃기겠지만 담요와 내가 한 몸이 되어 창문에 바짝 붙어 앉았다. 오롯이 나만 빛과 빛이 보여주는 세상을 보리라 마음먹었다. 창문을 조금씩 조금씩 천천히 아주 천천히 올렸다. 작은 틈새로 들어오는 빛은 여지없이 내 두 눈을 찡그리게 만들기 충분했다. 다시 천천히 조금씩 창문을 열었다. 드디어 비행기 창 밖의 세상을 볼 수 있었다.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풍광은 언제나 가늠할 수 없는 존재감을 뿜어낸다. 창 밖은 끝을 알 수 없는 푸른 바다와 듬성듬성 혹은 촤르르 펼쳐진 구름의 세상이었다. 언젠가 봤던 애니메이션의 주인공이 하늘을 날며 바람을 느끼고 드넓은 대지와 바다를 보며 환호성을 지르는 장면과 그 웅장한 오케스트라의 연주가 담요를 뒤집어쓰고 몰래 창 밖을 보는 나를 휘감고 있었다.


잠시 후 눈을 가득 채운 풍광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언덕이라고 해야 할지 산이라고 해야 할지 도무지 높이와 깊이를 가늠하기 어려운 높고 낮은 자연이 눈앞 가득 펼쳐졌다. 그리고 너른 들판이 이어졌다. 우리가 탄 비행기는 아드리아해를 지나 이탈리아 상공을 지나고 있었던 것이다. 잠시 후 짙은 초록빛과 여리디 여린 연둣빛이 펼쳐졌다. 그리고 그 옆에 씩씩한 파랑을 품은 초록빛과 명랑한 노랑을 품은 초록빛이 고개를 내밀고 노을 같은 붉은빛을 품은 초록빛과 차가운 듯 시크한 회색을 품은 초록빛이 존재감을 드러냈다. 서로 다른 명도와 채도를 가진 초록빛들이 잠시 사라진 곳에는 앞으로 어떤 초록빛이 생겨날지 궁금해지는 흙들의 공간이 보였다. 비어 있는 듯한 흙들의 공간이 쉼과 여유를 머금고 있는 것 같아 그 자체로 가득한 느낌이었다. 드디어 이탈리아 로마에 도착했다. 그리고 저 멀리 공항이 보이기 시작했다.




공항에 시선을 두고 있는데 내가 탄 비행기의 왼쪽 아래로 작은 비행기 그림자가 쫓아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림자는 내가 타고 있는 비행기와 가까워지기 시작했고 점점 커졌다. 작은 쿵 소리와 함께 비행기가 활주로에 닿자 점점 커지던 그림자는 비행기 보다 더 몸집을 부풀리다가 마침내 비행기와 한 몸이 되었다. 그림자의 동행이 든든하고 포근했다. 로마의 시간은 오후 6시를 조금 넘기고 있었다. 해가 뉘엿뉘엿 넘어갈 시간이라 그림자가 멀리 떨어져 있다가 활주로에서만큼은 얼른 자기 자리를 찾아온 것이었다.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온 그림자는 듬직했고, 조금 전 잠시 떨어져 있던 그림자는 참 자유로워 보였다. 나도 잠시나마 이곳 이탈리아에서 자유로운 영혼의 그림자처럼 지내보아야겠다.



서서히 힘을 빼던 비행기가 드디어 멈추었다. 13시간의 비행이, 7시간의 거꾸로 시간 여행이 끝났다. 이제부터는 이탈리아의 시간에 맞추어 지내보려 한다. 구부러져 있던 다리를 펴고 또박또박 걸음을 걸으며 주변에 대한 끊임없는 두리번 거림이 시작되었다. 두리번 거림은 분명 두근거림이다. 세상 모든 초록빛을 모아 놓은 커다란 카펫 위를 짝꿍과 손을 잡고 걷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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