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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처음부터 잘 키우자 Sep 11. 2024

구름 커튼

태양같은 나를 만날 틀리지 않을 기대감

일요일 이른 아침. 사람들의 표정에 담긴 피어나는 설렘과 약간의 싫지 않은 피곤함에서 새로운 친구를 만난듯한 반가움을 느꼈다. '저도 그래요.ㅎㅎㅎ'라는 작고 따뜻한 일종의 연대감이 느껴진달까. 흔들리는 지하철의 리듬에 맞춰 캐리어의 바퀴가 살짝씩 자리를 이탈할 때마다 캐리어의 손잡이를 꼬~옥 잡아 보며 애써 가만히 앉아 있었다. 지금 내 마음은 음소거된 불꽃놀이 동영상을 산사의 고즈넉한 새벽 예불 시간에 혼자 몰래 보는 느낌. 꾹 참아가며 조용히 기쁨을 다지고 있는 중이었다. 오늘은 이탈리아로 향하는 날이니까.


공항은 언제나 설렌다. 난 이 설렘이 너무 좋다. 그래서 아무리 급하더라도 절대로 장례식에 갈 때는 공항을, 비행기를 이용하지 않는다. 새로운 세상으로 들어가는 문 앞에 서 있는 듯 기분 좋은 이 셀렘과 누군가를 떠나보내고 기억하려는 슬픔과 비통함을 함께 섞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흐드러지게 핀 벚꽃이 빵 터질 듯한 기분에 아버지의 죽음의 기억이 섞인 것만으로도 난 앞뒤 안 맞는 감정들의 출렁임이 충분하니까 말이다. 통 창 너머 우리가 탈 비행기가 보이고, 비행기가 보이는 의자에 앉아 따끈한 라떼를 마셨다. 역시 최고의 뷰는 공항 통 창 너머의 비행기 뷰지. 시간의 사치가 시작되었다. 내 짝꿍의 어깨에 기댄 채. 아~ 이 한갓짐이란...... 결혼과 임신, 출산과 양육의 장면들과 울음과 웃음의 소리가 멀리 들렸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시끄러운 긴 터널을 막 빠져나와 심장박동과 같은 척척척 기차 바퀴의 일정한 소리에 감싸인 상태로 너른 들판을 마주한 느낌. 언제일까 기다렸던 순간이 나를 놀라게 하지 않은 채 슬며시 내 앞에 나타났다.



이내 나와 짝꿍을 태운 비행기는 약속한 시간에 정확히 이륙을 했다. 끝이 없을 것 같은 육아와 양육의 시간, 사춘기와 고3의 시간이 정확히 흘러 햇살이를 성인이라는 카테고리에 밀어 올려놓은 것처럼. 비행기의 굉음에 맞춰 마음속 불꽃놀이 동영상의 음소거가 해제되었다. 발아래의 세상이 아무리 손을 뻗어도 잡히지 않을 만큼 멀어지니 이내 동동 하얀 구름이 시야에 들어왔다. 푸른 산과 높은 건물, 그리고 파란 바다를 안 보여 주려는 듯 짓궂게 듬성듬성 구름들이 몰려들었다. '조금만 비켜줘.'라고 나도 모르게 구름에게 애교 섞인 부탁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구름 위 쨍하게 내리쬐는 햇살이 반가웠다. 곧 눈이 부셔 창을 닫아야겠지만 그 순간만큼은 햇살에 눈이 시려도 좋았다.


날씨가 우리의 기분만큼이나 좋았다. 구름 아래나 위나 똑같은 것이 잘 익은 홍시처럼 기분을 좋게 했다. 날씨를 좌우하는 게 구름이라는 생각이 새삼스럽다. 여행을 할 때마다 늘 지금처럼 날씨 운이 좋았던 것은 아니었다. 언젠가 여행을 가던 그날에는 회색빛 짙은 먹구름이 비까지 마구 쏟아냈었다. 비행기가 뜨기는 할까를 고민할 정도였는데 다행히 비행기가 이륙을 했다. 이륙 후 잠시 먹구름 속에 잡혔다가 먹구름 보다 더 높은 곳에 가 닿았을 때 마주한 그날의 그 햇살을 난 잊지 못한다. 그날의 햇살은 쨍하다, 눈이 부시다는 표현으로는 너무나 부족한 강렬함을 뿜어내고 있었다. 분명 그건 햇살이 아니라 태양이었다.


우주 속 키 작은 먼지가 발 붙이고 살고 있는 푸른 별 지구는 구름의 장난과 심술에 날이 좋았다 나빴다를 반복하고 있지만 언제나 태양은 저렇게 강렬한 존재감을 뽐내고 있었던 것이다. 이쯤 되면 흐린 날과 그 흐린 날의 우울함에 대한 책임을 구름에게 물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구름이 태양 앞에 커튼을 치는 장난을 친 걸 잊은 채 얼굴을 보여주지 않는 태양에게만 괜한 탓을 한 것이 참 미안해졌다. 아니 어쩌면 태양도 자기를 보여주고 싶지 않을 때도 있겠지. 그리고 보고 싶지 않은 걸 안 보려고, 가끔 혼자만의 시간을 가져야 해서 구름의 도움을 살짝 받아 커튼을 쳤을지도 모르지. 이러면 구름에게 책임을 묻는 것이 아니라 태양을 위해 기꺼이 커튼이 되어준 것에 대해 태양을 대신해 고마움을 전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이 여기 저리 흩어졌다.


가끔 나를 괴롭히는 우울도 이렇겠지. 여기저기 흩어진 생각의 조각들이 성글게 엮어진다. 나는 가끔 회색빛 커튼이 위에서 아래로 아래로 내려오는 경험을 한다. 그런 날은 여지없이 우울이란 녀석이 찾아온다. 우울을 흔히 영혼의 감기라고 한다. 몸이 무리를 하면 면역체계가 흔들리면서 쉬라는 일종의 경고를 하는 게 감기라면 우울도 마음이 더 힘들어지기 전에 쉬라는 나를 위한 방어기제일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보통 우울이란 어느 날 갑자기 심각하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처음에는 모르다가 심각해지면 알게 되니 그게 문제인 것이다. 너무 심각하게 다가오니 해결을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해지는 것이다.


세상에 우울은 참 여러 가지 모습으로 나타나는데 나는 그중에서도 육아를 하는 동안 부모가 느끼는 우울이 제일 힘든 것 같다. 자신의 우울만으로도 힘이 드는데 육아를 하는 동안의 우울은 부모 자격이 없는 것 같이 느껴지고 아이에게 미안해지며 자꾸만 죄책감과 연결되기 때문이다. 그러면 여지없이 육아로 인한 우울감을 부정하게 되고 더 좋은 부모로서 역할을 하려 스스로를 다그치는 일이 생기기도 하고 그러다 보면 더 부모역할로부터 도망치고 싶어지기도 한다. 언제 올지 모르는 우울이 언젠가 찾아오면 그냥 인정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부모도 처음부터 부모가 아니었다. 누군가의 자녀로, 누군가의 친구로, 누군가의 연인으로, 누군가의 동료로 살던 사람이 아이를 낳게 되면 부모라는 완전히 새로운 생태계에 진입을 하게 된다. 외부의 인간관계에서 단절이 되면서 당연히 홀로 섬에 고립된 듯한 느낌이 들게 되고 서툰 부모 역할은 나의 불안감과 초조함을 키우게 된다. 그동안 나의 생태계를 완전히 벗어나 다른 생태계로 진입을 했으니 서툴고 힘든 건 당연한 것이다. 이 당연함을 부정하고 내가 만든 좋은 부모의 기준에 나를 맞추려고 나를 채찍질을 하니 아이를 키우는 건 너무 힘들어지고 우울감은 자꾸만 나를 바닥으로 가라앉게 한다. 그냥 아이가 좋지만 아이를 키우는 건 어렵고 나도 예전처럼 편하게 밥 먹고 놀고 일하고 싶다고 말해 보면 좋겠다. 그런다고 절대로 나쁜 부모가 되는 것은 아니니까.


나도 아이를 키우는 전업 육아맘일 때 이 우울이 참 싫었다. 우울은 나의 발을 한 없이 무겁게 만들어 움직이지 못하게 하고, 머릿속을 연기로 가득 채워 생각하지 못하게 하고, 결국은 바닥으로 꺼지게 만드니 결코 반가울 일이 만무하다. 그런데 오늘은 나의 우울도 나를 막는 것이 아니라 나를 가려준 것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스친다. 내가 미처 모르고 지나치고 있는 마음에 대해 위로와 함께 멈추라고 잠시 쉬라는 신호를 보냈던 것은 아니었을까. 너무 배운 대로 좋은 부모가 되려고 억지로 부모의 틀에 나를 껴맞추지 말라고 말이다.


언젠가 우울이 다시 고개를 내밀어 나를 찾아올 것이다. 늘 태양과 햇살만 있을 수는 없으니까. 우울의 이유도 모습도 아주 다양할 것 같다. 또다시 우울이 찾아와 태양이 보이지 않으면 태양을 원망하지 말고 잠시 구름 커튼 아래에서 쉬어봐야겠다. 잠시 쉬었다 우울한 회색빛 커튼을 걷어내면 그곳에는 또 반드시 태양 같은 내가 있을 거라는 틀리지 않을 기대가 생긴다. 그래도 비행기가 태양 앞에 나를 데려다준 것처럼 정말 가끔은 아주 가끔은 누군가 나를 태양 앞에 데려다주면 좋겠다.


쨍한 오늘의 여행을 허락해 준 구름에게 감사를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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