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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처음부터 잘 키우자 Sep 20. 2024

매혹적인 아침

웰컴 선물

새벽 1시. 내 몸이 놓여 있는 로마의 시간은 새벽 1시다. 그리고 한국은 오전 8시다. 원래는 지금 로마는 자정이 맞지만 며칠 전 부터 이탈리아에 서머타임이 시작되어 시차가 1시간 줄어 들었다. 한국의 시간이 오전 8시라는 것은 햇살이와 요술이가 일어나 등교 준비를 하고 있을 시간이란 뜻이다. 평소 내가 깨우지 않아도 스스로 일어나 등교 준비를 잘 하던 아이들이라 걱정할 건 아니지만 괜히 엄마 아빠가 없다는 이유만으로 잘 일어났는지가 궁금하고 내심 신경이 쓰였다. 잠시 떨어져 있었다고 보고 싶기도 하고, 지금 집 상황이 궁금하기도 하고, 다른 시간대에 있다는 것이 신기해 한껏 들뜬 상태로 요술이에게 전화를 했다.


"요술아~~~~ 아들 잘 잤어? 보고 싶네."

"응. 엄마, ㅎㅎㅎ 거기 몇시야?"

"여긴 새벽 1시야."

"우와! 신기하다. ㅎㅎㅎ"

"학교 갈 준비는 다 했어?"

"당연하지. 나 지금 학교 가는 길. 누나는 내가 깨워 놓고 나왔어."

"헐... 요술아! 고마워. 학교 잘 다녀와."


이 쯤 되면 햇살이를 요술이 보모로 임명하며 손에 쥐어 준 10만원이 정말로 아까워 지는 순간이었다. 순간 나의 짝꿍을 결코 부드럽지 않은 눈길로 바라보았다. 짝꿍은 이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상황이 웃기다고 웃고 있었다. 역시 아이들은 내가 생각한 것 보다 훨씬 많이 자라 있고 믿음직한 존재라는 걸 또 한번 느꼈다. 아이들이 자라는 걸 모르는 건 정말 부모뿐인가 보다. 요술이가 등교를 하고 있으니 앞으로 하교를 할 때 까지 8시간 정도는 확실히 아무일도 생기지 않을 거라는 마음에 편안히 잠자리에 들었다.


그러나 몸은 정말 피곤한데 눈을 말똥말똥. 주말에도 늘 늦잠을 자겠다고 마음을 먹지만 8시 전에 일어나고야 마는 나라서 한국 시간으로 오전 8시인 지금 쉽게 잠이 들 일이 만무했다. 특히나 비행기에서 잘 만큼 잤고 아침에 보게 될 중세의 도시에 대한 설렘은 나의 의식을 자꾸만 흔들어 깨웠다. 침대에서 뒤척이다 잠을 자다 깨다를 반복했다. 평소 같으면 짜증이 날 상황이지만 자다 깨다 반복해도 괜찮다. 오히려 잠을 깬 덕에 아무 생각 없이 뒹굴거리는 새벽의 여유가 참 좋았다. 잠 따위 조금 못 자서 피곤해도 괜찮다. 여긴 이탈리아 로마이고 난 여행 중이니까. 아~ 너무 좋다~~~~ 짝꿍도 바뀐 잠자리와 달라진 시간 탓에 깨우지 않아도 이른 아침에 눈을 떴다. 로마의 매직인가 보다. 이 매직은 한국에서도 계속 이어지길 부질없는 소망을 품어 보았다.




먼저 준비를 끝낸 짝꿍은 내가 준비를 하는 동안 호텔 옆에 뭐가 있는지 나가서 살펴보겠노라며 잠시 외출을 했다. 그리고 잠시 후 카톡이 울린다. '빨리 나와야 해.'라는 짝꿍의 짧은 톡이었다. 빨리 나오라니 뭐가 급해서 하는 생각과 동시에 자연스럽게 창 밖을 보았다.



어머! 세상에! 통창 밖에 보이는 하늘이 온통 붉은색이었다. 바로 앞에 위치한 호텔의 꼭대기를 검은 연기가 뒤덮고 있었다. 그리고 연기는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바람이 강해 언제든 저 검은 연기가 그리고 불씨가 내가 묵은 호텔을 덮칠 것만 같았다. 한국에서 7시간이나 떨어진 먼 곳에서 그것도 하필 이 좋은 여행을 시작하려고 하는 날 아침부터 이런 일이 생기다니. 분명 이런 일은 나와 짝꿍의 여행 계획에 없던 일이다. 우리가 여행을 하는 동안 혹시나 아이들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어쩌나를 걱정했지 우리에게 닥친 이 재앙이 뉴스를 통해 아이들에게 전달되는 그런 상상은 정말 하지 못했다. 나는 최악의 상황을 예상하며 그렇게 되지 않도록 침착하게 핸드폰과 여권이 든 가방만 들고 재빠르게 방을 빠져나가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주변이 고요할까. 천혜의 자연을 가진 이탈리아 사람들은 늘 느긋하다고 들은 적은 있지만 그래도 이런 위급한 상황에 이렇게 조용한 건 아니지 않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하다 못해 소방차의 사이렌 소리는 들려야 되는 거 아닌가. 난 안경을 쓰고 다시 창 밖을 바라보았다.


가로등은 아직 불이 켜진 상태였다. 점점 밝아 오는 빛에 가로등이 맥을 못 추고 희미해지고 있었지만. 밝은 빛을 중심으로 노란색, 오렌지색, 다홍색, 짙은 핑크색이 하늘 따먹기를 하고 있었다. 서로서로 하늘을 많이 가지겠다고 욕심을 부리고 있어서 하늘은 금세 색깔이 섞여 짙어졌다가 다시 밝아지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위를 무심히 그리고 빠르게 파란색을 품은 짙은 회색빛 구름이 지나가고 있었다. 지중해에서 떠오르는 해였다. 이탈리아에서 보는 지중해의 일출이었다. 처음 보는 로마의 매혹적인 아침이었다.


강렬하다. 붉다. 깊다. 짙다. 그리고 위험해 보인다. 너무 매혹적이라서. 지난밤 지나다니는 차들의 소리에 시끄러워 잠을 설쳤고 시차로 인해 잠을 또 설쳤는데 그에 대한 보답 같은 아침이었다. 웰컴 선물이었다.


1층 로비로 내려와 기다리고 있던 짝꿍을 만났다. 짝꿍은 나를 보자마자 일출이 너무 보기 좋아서 빨리 나오라고 했다며 불난 것 같지 않냐고 물었다. 나와 짝꿍이 같은 생각과 느낌을 가지고 있는 것에 피식 웃음이 났다. 하늘이 보여주는 아침 쇼가 끝나기 전에 더 많이 보기 위해 우린 손을 잡고 호텔 밖으로 나갔다. 천천히 걷다 서다를 반복하며 머리 위 하늘을 눈에 그리고 기억에 담았다. 바람은 시원하고 하늘은 아름다웠다. 그리고 짝꿍의 손은 부드럽고 따뜻했다. 호텔 한편에 서 있는 사이프러스 나무가 점점 더 짚어지고 있었다. 죽음과 경건함의 의미로 다가오는 사이프러스 나무가 오늘따라 더 차분해 보였다. 끝없이 올라가는 나의 흥분된 마음을 잡아 주며 조금 더 천천히 지중해의 해를, 로마의 아침을 맞이하라고 속삭이는 듯했다.




#이탈리아 #육아 #부부여행 #로마의아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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