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의 키 작은 먼지가 날아갈 곳
은하계에는 아주 많은 별이 있고 그 별 중 하나가 지구이며 지구는 작고 작은 별이라고 한다. 그래서 그 안에 살고 있는 사람이란 생명체는 우주의 먼지 같은 존재라고들 한다. 게다가 나는 사람 중에서도 키가 작은 사람이니 나는 우주의 키 작은 먼지임에 틀림없다. 은하계의 시간 속에서, 지구의 시간 속에서 찰나의 시간을 보낼 우주의 키 작은 먼지가 짝꿍의 손을 잡고 폴폴폴 날아갈 곳이 어디일까? 행복한 고민이다. 고민의 시간은 짧지 않았다. 그런데 사실 우주의 키 작은 먼지가 폴폴폴 날아갈 곳은 이미 오래전에 정해져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는 동안 여러 곳을 상상하고 비교하고 고르며 참 많이 설레고 행복했었다. 그리고 고민의 끝에 마침내 결정된 그곳은 혼자만 숨겨 놓은 마음의 점 같은 곳이라 잠시 잊고 살다가 다시 생각난 곳이었다. 감추려던 건 아니었는데 나의 의식 저 편에 감추어져 뽀얀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다가 어느 날 빼꼼히 고개를 내밀고는 '거기. 거기 안 갈 거야?'라고 말을 걸어 주는 것 같았다. 우주의 키 작은 먼지가 짝꿍과 갈 그곳은 오랜 시간 동안 우주의 키 작은 먼지에게는 동경의 장소였다.
"이번 여름휴가 때는 지중해 한 바퀴 돌아요."
90년대 중반 텔레비전에서 방영된 '젊은이의 양지'에서 재벌집 딸 석란이 한 대사다. 가족이 근사한 거실 소파에 앉아 있고 석란은 소파에 몸을 의지하고 선 채 가족들에게,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아버지에게 여름휴가를 제안하는 장면이다. 오래된 드라마라 다른 장면들은 잘 기억되지 않지만 그날 그 거실씬만큼은 내 기억 속에 콕 박혀 있어 생생하게 떠오른다. 얼마나 돈이 많으면 여름휴가를 지중해로 갈까? 뭐, 드라마고 재벌이니까라고 치부하기에는 그 한 줄의 대사는 너무나 강렬했다. 그 한 줄의 대사가 왜 그렇게 강렬했을까? 지구에 관심도 없고, 동서남북도 잘 구분 못하는 방향치인 나에게 지리 수업은 고역이었으며 이런 나에게 지구 어디엔가 있을 지중해는 그리 관심을 끌 수 있는 것이 절대로 아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여름휴가로 떠나는 '지중해'의 강렬함은 늘 나를 따라다녔었다. 나도 참 그런 것이 그렇게 궁금하고 강렬한 지중해라면 지도를 펼쳐 어디에 있는 건지 한 번쯤 찾아볼 만도 하고, 그게 아니면 수업 시간에 사회과 부도에서 스치는 인연으로라도, 실수로라도 지중해를 한 번쯤 봤을 만도 한데 절대로 보았던 기억이 없다. 왠지 찾아보면 안 될 것 같은 마음. 찾아보면 무언가 들킬 것 같은 마음. 그 마음이 너무 작고 애처로워 감히 펼쳐볼 엄두를 못 내었던 것 같다.
시간이 지나고, 나도 자라 어른이 된 다음에 생각해 보니 멀리 해외로 여행을 가는 것 이상으로 그런 휴가 계획을 가족이 같이 짠다는 게 더 생경했던 것 같다. 생경한 만큼의 거리가 내가 가족에게,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부모님께 느낀 거리였으리라. 부모와 자녀의 적당한 거리. 어느 정도라고 말하기 참 애매하고 모호하고 사람마다 너무 주관적이라 한 마디로 정의하기는 참 어렵다. 그래도 대다수의 사람들은 가까운 것이 좋다고 믿으며 가까운 정도를 한 마디로 표현한다면 '친구 같은 부모'라고 말들을 한다. 그런데 기분이 좋을 때에는 친구 같은 부모인데 기분이 나쁠 때에는 '내가 네 친구냐?'로 변할 때가 있어 친구 같은 부모와 친구냐의 사이에서 줄타기를 잘해야 한다.
대개 친구 같은 부모란 친밀하고 스스럼없이 서로의 속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정도의 관계일 것이다. 그런데 사람과의 관계는 친밀해질수록 그 선을 지키지 못하고 '너 잘되라고, 너 위해서 하는 말'이라는 가면을 쓰고 어물적 선을 넘을 때도 있고, 나이를 무시하고 진짜 친구에게나 할 수 있는 말과 행동들로 서로의 기분을 상하게 하기도 한다. 선을 넘게 되면 예의가 없어지고 불필요한 간섭을 하게 되어 '친구 같은'이 바로 '친구냐'로 변하게 되는 것이다. 둘 사이의 선. 그것을 잘 지키려면 서로에게 '권위'를 인정하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흔히 권위라는 말만 들어도 부정적인 이미지를 떠올릴 때가 많은데 이는 권위적인 사람들로 인해 권위의 원래 의미가 훼손되었기 때문이다. 권위란 특정한 영역에서 인정을 받고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치는 능력을 말하는 것으로 그 역할을 잘하는 능력 정도라고 정의할 수 있겠다. 따라서 부모와 자녀의 관계에서도 권위적일 필요는 없으나 반드시 권위는 있어야 하고 그래야 친구 같은 부모이면서 자녀에게 부모다운 영향을 끼쳐 안정된 관계를 유지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권위적인과 권위가 있는의 차이는 지극한 애정을 바탕으로 하는 존중의 정도의 차이가 결정하게 된다.
석란이 지중해를 한 바퀴 돌자고 했을 때 아버지는 분명 기꺼이 웃으며 그 생각에 대해 수용해 주었던 기억이 있다. 그 눈빛과 울음소리. 그건 분명 애정이 바탕이 된 존중이었다. 따뜻하고 행복한 느낌이었다. 내가 만약 이런 말을 했다면 아마도 쓸데없는 소리를 한다며 핀잔을 들었을 것 같다. 그래서 쓸데없는 소리를 하는 쓸데없는 아이가 될까 봐 지중해를 찾아볼 엄두조차 내지 못했던 것 같다. 나는 그 시절 존중이라는 단어를 알기는 했을까. 그만큼 나와는 다른 세상의 어휘였던 것 같다.
나는 어릴 적 초록색 지붕집의 주근깨 빼빼 마른 빨강 머리 앤을 보면 참 싫다는 생각을 했었다. 앤은 늘 생각이 많았고 생각이 많은 만큼 말도 많았다. 그런데 그 생각과 말이 어른들의 시선에서는 늘 쓸데없는 것이 되어 마릴라의 핀잔의 대상이 되곤 했다. 그러나 앤은 꿋꿋이 생각을 실행에 옮기며 여러 가지 사건사고를 그림자처럼 달고 다녔다. 이런 앤에서 실행력만 뺀 것이 나라서 나는 앤을 볼 때마다 참 싫었다. 그러나 주말 아침이면 늘 그 앤이 보고 싶어 아침 일찍 눈을 뜨곤 했었다. 이런 앤과는 다른, 아주 많이 다른 앤을 좀 더 자란 후 만나게 되었다. 바로 로마의 휴일에 나오는 앤 공주. 앤 공주는 주어진 역할에 맞는 말과 행동을 했어야 했고 그에 대한 답답함으로 한 밤 중 몰래 로마 시내로 나와 배회하게 되는데 그때는 앤 공주의 그 무게감과 답답함 보다는 세상 물정 모르고 대접받으며 속 편하게 사는 인물로만 기억되었다. 그래서 공주나 되는 것이 저래서야 되겠느냐는 비난을 마음속으로 조용히 했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면 빨강 머리 앤이나 앤 공주나 자기 생각대로 다 하고 살지 못했던 것은 매 한 가지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갖추고 있는 실행력과 엉뚱함과 대담함도 똑 닮아 있는 듯하다. 빨간 머리 앤은 나 같아서 싫고, 앤 공주는 세상 물정도 모르고 대접만 받으며 사는 것 같아 시기와 질투가 나 싫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두 앤의 공통분모인 '하고 싶은 것은 한다'라는 나에게 없었던 그 대범함과 실행력에 질투가 나 싫어했던 것 같다.
세계 지도를 펼쳐보면 포르투갈, 스페인, 프랑스, 이탈리아, 그리스, 튀르키예, 시리아, 이집트, 리비아, 튀니지, 알제리, 모로코가 모두 지중해를 접하고 있어 그 어느 나라를 가도 지중해를 볼 수 있다. 그 어디를 가도 지중해를 느낄 수 있다. 그러나 늘 나와 함께 있어 주었던 두 앤과 지금의 내가 서로 닮은 구석이 있는지 맞춰보고 싶은 나는 앤 공주가 걸었던 로마의 거리가, 로마가 있는 이탈리아가, 이탈리아에서 바로 보는 지중해가 궁금했다. 그리고 가 보고 싶었다. 내가 짝꿍과 다정히 손을 잡고 이탈리아로 폴폴폴 날아가기 위한 이유는 충분했다. 아주 오래전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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