씻고 올게~
옛사람들의 말은 정말로 틀린 게 없구나.
노~세 노세 젊어서 놀아~~
여행을 오기 전에 여행 유튜브를 봤었다. 낯선 사람들과 함께 하는 패키지여행이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순수하게 이탈리아 여행에 대한 궁금증도 있었다. 영상에서 느낀 공통점은 이탈리아의 아름다움과 경이로움과 신기함도 물론 있었지만 더 크게 와닿은 것은 꽉 짜인 일정에 따른 빠듯함과 바쁨이었다. 여행에서 빠듯함은 충분히 인정할 수 있다. 한 번 내기 힘든 그 시간을 내어 이 멀리 까지 왔으니 하나라도 더 봐야 하고 그로 인한 빠듯함은 어쩜 여행자의 성실함이고 목적일 수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바쁘다니. 여행은 곧 쉼이고 비움이고 시간의 사치라고 생각하는 나는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호했다. 그리고 뒤따라 나온 공통점은 피곤하다였다.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그리고 부모에게 피곤함이란 없으면 더 이상한 것이라 그럴 수 있겠다고 생각은 했는데 진짜 피곤했다. 그동안 여행에서 느껴보지 못했던 피곤함이었다. 살짝 그동안 내가 너무 긴장 없이 살았나 싶을 정도로. 아마도 여행의 피곤 외에 시차로 인한 피곤이 더해져서 그런 것 같았다. 가이드의 말에 따르면 몸이 하루에 1시간씩 시간에 맞춰지다가 집으로 돌아갈 때 쯤되면 완전히 맞춰진다고 했다. 안 믿었는데 진짜로 그 말은 맞았다. 역시 전문가의 말은 새겨 들어야 하는 것이다.
버스로 긴 시간 이동을 하고 여러 곳을 계속 아주 많이 많이 걸어 다닌 탓에 호텔에 들어섰을 때 이미 나는 빈 껍데기만 남은 것 같았다. 아직 이탈리아의 시간에 적응을 못한 탓에 우리나라의 시간으로 따져보면 오후 세네시에 놀기 시작해서 밤새 놀고 새벽 세네시에 호텔에 돌아온 것과 같았다. 그리고 나는 20대가 아니라 40대 후반이니 피곤한 것은 당연했다. 역시 한 살이라도 더 늙기 전에 더 놀아야 한다는 내 계획은 결코 수정이 필요 없는 최고의 계획임을 또 증명하게 되었다.
호텔에 도착하자마자 푹신한 침대에 얼굴을 묻었다. 포근했다. 편안했다. 온몸이 스티커처럼 침대에 딱 달라붙는 것 같았다. 짝꿍이 친절히 나의 운동화를 벗겨내고 내 부운 두 다리를 주물러 주기 시작했다. 아픈데 시원했다. 시원한데 간지러웠다. 짝꿍의 장난기가 발동한 것이었다. 그리고 스치는 손길이 따뜻한데 조금은 뜨거워지는 느낌이었다. 잠이 소르르 들락 말락 의식이 조금씩 흐릿해졌다. 샤워를 하고 싶다는 생각에 눈을 떠 보지만 자꾸만 눈꺼풀이 닫히기를 반복했다. 그리고 짝꿍의 목소리가 들렸다.
"씻고 올게~"
밥 먹자는 말은 대강 세 가지 의미가 있는 것 같다. 대상에 따라. 그냥 지인이 밥 먹자고 하면 진짜로 밥 먹자는 것이고, 찐친이 밥 먹자고 하면 같이 만나 놀자는 것이고, 명함을 들고 만나는 사람이 밥 먹자고 하면 도장을 찍자는 것이다. 그래서 밥 먹자고 하는 사람이 누구냐에 따라 나는 시간을 다르게 빼놓는다. 말의 의미는 이처럼 참 심오하다. 그리고 내가 방금 들은 짝꿍의 씻고 올게라는 말도 참 여러 가지 의미가 있다. 장단에 따라. 추임새에 따라. 그냥 '씻고 올게.'라고 단음으로 끝나면 정말로 씻겠다는 것이다. 깨끗하게. 그리고 씻고 올게 앞에 '어~'가 붙은 '어~ 씻고 올게.'면 너무 덥고 땀에 절어 씻으며 개운해지겠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오늘 같이 '씻고 올게.'다음에 물결무늬가 하나 붙은 장음의 '씻고 올게~'는 영 다른 의미가 된다.
"오늘 그대를 만나고 싶습니다."
여기서 만나고 싶다는 의미는 생략하기로 하겠다. 짝꿍이 속삭이듯 말을 한 건지 잠이 소르르 들려하는 내가 그렇게 들은 것인지 짝꿍의 목소리가 아득하게 들렸다. 아득한 느낌을 따라 잠시 오래전 그날 그 공간으로 들어갔다.
지금과 똑같이 생겼지만 분명 다르게 생긴 두 사람이 있다. 오늘 갓 결혼을 한 신랑 신부다. 신부는 신부의 상징인 올림머리를 하고 있다. 신부는 하루 종일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화려하지만 무겁고 어색한 드레스를 입고 있느라 몸이 지칠 때로 지쳐 있다. 그리고 신랑은 피로연 자리에서 짓궂은 지인들에 취해, 분위기에 취해 한 잔 한 잔 받아 마신 술로 인해 지쳐 있다. 분명 신랑도 신부도 빨리 씻고 쉬고 싶을 것이다. 어른이니 어른답게 각자 씻으면 되는데 참 큰 일이다. 신부의 머리에 꽂혀 있는 수많은 실핀들. 겉에서는 잘 보이지도 않는다. 신부는 신랑에게 머리에 꽂힌 실핀을 뽑아 달라고 한다. 첫날밤에 단추를 푸는 신랑은 많이 봤는데 머리핀을 뽑는 신랑이라니. 드라마나 영화의 첫날밤을 좀 현실감 있게 바꿀 필요가 있겠다. 신랑은 열심히 정성을 다해 머리카락이 뽑히지 않게 어설픈 손짓으로 실핀을 뽑았다. 무려 개수까지 새어가면서. 개수에 대한 감탄은 추임새다. 우아한 신부는 더 이상 없다. 머리를 산발한 저 여인은 아까 그 신부가 맞는지. 그래도 다행이다. 신랑이 취해서 잘 모르는 것 같다. 샴푸를 하고 하고 또 한다. 클렌징도 하고 하고 또 한다. 화장이 아니라 분장인 게 확실하다. 신부의 샤워 시간은 길다. 그래도 다행이다. 신랑이 아직 깨어 있다. 신랑도 샤워를 한다.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다. 신랑과 신부는 커플잠옷을 입고 한시가 급한 이 시점에도 늘 그렇듯이 인증샷을 남긴다. 붉은 와인으로 서로의 사랑을 다짐한다. 그리고 둘은 행복한 몸짓을 한다. 둘에겐 둘만 있다. 그 외 아무것도 없다. 결혼 준비를 하며 왜 그렇게 신경을 써서 속옷을 골랐는지. 속옷만큼 무용한 것이 없다. 오늘 이 밤에는.
회상인지 꿈인지 잠시 오래전 그날로 다녀왔다. 그리고 오늘 우리는 석회가 섞여있을까 봐 걱정한 물로 아주 편안히 샤워를 하고 가벼운 옷차림으로 마주 앉았다. 호텔 옆 마트에서 이탈리아산 와인을 사서 오래전 그날처럼 영원한 사랑을 다짐하기로 했으나 마트가 너무 이른 저녁 8시에 문을 닫는 바람에 사지 못했다. 여기 이탈리아는 워라밸이 정말로 확실한 것이 틀림없다. 와인 대신에 집에서부터 소중하게 챙겨 온 소주를 꺼내었다. 역시 어른의 술은 소주인가. 한 잔 넘기니 화하고 알싸한 그리고 다디단 맛이 입 안에 확~ 퍼졌다. 하루의 피곤이 싹~ 달아났다. 뭐든 할 수 있을 것만 같은 밤이었다. 우린 오늘 찍은 사진을 보고 하루를 정리했다. 그리고 아이들이 등교를 할 시간에 맞추어 전화 통화를 했다. 전화를 끊은 그 공간에는 짝꿍과 나 우리 둘 뿐이다. 풋풋한 신혼기에는 서로가 서로를 아무 때나 만날 수 있었다. 아이가 태어나고 육아에 지쳐갈 때에는 늘 체력이 부족했다. 그리고 아이들이 남녀에 대해 알아갈 때쯤부터 우린 서로가 서로를 만나는 것에 무척 조심스러워졌다.
그러나 지금은 짝꿍과 나 둘만이 이 공간에 있을 뿐. 눈동자가 머무는 곳에 손길이 닿았다. 손길이 닿은 곳에 작은 파동이 일었다. 파동은 조금씩 커지고 호흡이 멈추었다가 깊어졌다. 귓가를 맴도는 나지막한 속삭임과 몸으로 새어 들어온 사랑이 황홀했다. 오래전 그날과 같은 서툴고 불붙는 열정이 아니었다. 서로에게 서로가 잘 맞춰진 느낌. 오랜 세월이 서로가 서로에게 만들어준 리드미컬한 움직임이었다. 뜨겁고 야릇하지만 그 안에는 즐거움과 여유와 코믹힘이 한데 어우러져 있었다. 감정들이 서로를 방해하지 않도록 모나지 않게. 오랜 시간을 함께 한 찐 사랑의 몸짓은 세상에 뿌려진 날것들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흔하디 흔한 영상에서는 결코 볼 수 없는 깊은 여운, 사랑의 맛이 있다.
'가족끼리 그러는 거 아니야.' 개그 프로에서 부부끼리 빵 터지는 웃음 포인트로 사용되는 말이다. 그럼 누구랑 한다는 말인가? 실없는 농담으로 하는 말이지만 절대로 농담으로라도 해서는 안 되는 말이 분명하다. 술과 사람은 오래될수록 좋은 법이라고 한다. 술은 오래될수록 맑아지니 분명 사람도 그럴 것이다. 사람이 맑아지고 사랑도 맑아지면 좋겠다. 우리를 세상의 전부라고 바라보고 있는 아이들이 맑은 사랑을 배울 수 있도록, 할 수 있도록 말이다. 술이 익듯 짝꿍과 나도 익어간다.
속옷만큼 무용한 것이 없었다. 오래전 그날 밤과 같은 그날 밤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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