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갈, 편안, 홀가분, 당신의 흔적
우산소나무, 사이플러스, 올리브나무. 그리고 넓고 넓게 펼쳐진 들판. 길을 걸으며, 차를 타고 달리며 보이는 풍경이 참 새로웠다. 우리나라에서 많이 보던 벚나무, 은행나무, 소나무, 메타쉐콰이어가 아니니 당연하다고 생각했었다. 물론 차지하고 있는 대지의 넓이도 다르고. 다른 건 분명 당연한 것이었다. 그런데 다르다, 새롭다, 이국적이다라는 표현으로는 딱 들어맞지 않는 다른 느낌이 자꾸만 나를 따라다니는 건 왜일까? 평소의 습관처럼 다른 느낌과 그 느낌에 대한 이유를 나는 어느새 찾고 있었다. 다른 느낌의 정체는 정갈하다, 편안하다, 홀가분하다였다. 그래서 그냥 풀들이 가득한 사람의 손길이 전혀 닿지 않은 너른 땅도 마치 가꿔놓은 수목원의 한 켠처럼 보였다. 초록빛의 나무들이 주는 한가로움에 빠져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동안 산지미냐노에 도착을 했다.
큰 돌들로 만들어진 중세의 거리로 다시 들어서는 순간 딱 들어맞지 않는 느낌의 이유를 찾던 나를 나는 까맣게 잊어버렸다. 산지미냐노는 관광지답게 여행자들이 참 많았고 여행자들이 많은 만큼 탄성과 즐거운 웃음소리도 많았다. 길을 걷다 만난 광장에는 우물이 보이고 옆에 사람들이 길게 늘어선 줄이 보였다. 뭔가 핫한 곳이 있나 보다 했는데 바로 그곳에 젤라토 장인의 가게가 있었다. 그리고 거리 곳곳에 있는 기념품 가게에는 피노키오 인형이 많이 보였는데 알고 보니 피노키오의 작가 카를로 콜로디가 이탈리아 사람이라고 한다. 유명 맛 집의 긴 줄이나 유명한 사람의 굿즈를 파는 것은 세상 어디나 똑같다는 생각에 살포시 웃음이 났다. 그런데 이번에는 똑같아 신기한 것이 있었다. 그렇게 많은 가게들의 느낌이 거의 비슷하다는 것이었다. 건물은 당연히 중세시대부터 아니 어쩜 그 이전부터 이곳의 터줏대감으로 자리를 잡은 것들이니 당연한데 그 안에서 삶을 꾸려가는 건 분명 이 시대의 사람들이고 다들 생각도 다르고 개성도 있을 텐데 모든 가게의 내부가 거의 동일하였다. 내벽, 천장, 바닥은 그대로 두고 필요한 선반과 테이블, 의자 그리고 파는 물건만 가득 채워 놓았기 때문이었다. 허긴 이렇게 고풍스러운 건물에 인테리어를 새로 한다는 것 자체가 쓸데없는 행위일지 모르다는 생각에 절로 동의를 하게 되었다. 오랜 시간 이곳을 지켜온 사람들의 마음인가 보다.
사람들이 많은 길을 따라 여느 여행자들과 같이 둘러보다가 건물 사이로 펼쳐진 초록빛의 향연에 나도 모르게 골목으로 들어서게 되었다. 의도치 않게 신혼 여행 중 길을 잃었을 때에도, 또 다른 곳을 여행할 때 의도 해서 주목적지를 벗어났을 때에도 나와 짝꿍은 정처 없이 이곳저곳을 헤매며 그곳의 진짜 모습을 보는 걸 좋아한다. 이번에도 벗어나 보기로 했다. 작은 골목을 지나자 여행자들은 보이지 않았고 대신에 새소리가 들렸고 이곳 사람들의 삶이 보였다. 담장 너머 핀 꽃들과 창문 앞에 놓여 있는 작은 화분들, 집에 딸린 차고지에 주차되어 있는 작은 자동차, 널려 있는 이불과 옷가지, 여행자들로부터 거리를 두게 하는 닫혀 있는 대문들. 조용하고 아늑함에 취해 계속 안으로 안으로 걸어 들어가게 되었다. 걸음이 멈춘 곳 앞에는 약간의 절벽과 절벽 아래에 펼쳐진 올리브 농장과 그냥 너른 들판들이 보였다. 또다시 정갈하고 편안하고 홀가분한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속이 뻥 뚫리게 명쾌한 답을 얻었다. 유레카라고 외치고 싶을 만큼.
아~ 그 많은 덩굴이 없구나.
답은 덩굴이었다. 나는 차창 밖으로 스치며 지나가는 풍경을 보는 것을 좋아한다. 노란빛 개나리, 분홍빛 벚꽃, 하얀빛의 이팝나무에 꽃이 피는 봄을 좋아한다. 꽃이 진 다음 보드라운 연둣빛 잎들은 마음까지 들썩이게 한다. 그리고 짙어지는 초록빛과 새빨간 장미꽃과 파스텔톤의 수국이 피는 여름을 좋아한다. 그런데 여름이 시작될 때부터 겨울이 오기까지 마음이 답답해진다. 산과 나무들이 점점 더 덥수룩해지기 때문이다. 어딜 가나 늘어져 있는 덩굴이 온 산과 나무를 점령해 버리는 것이다. 어떤 곳에 가면 모든 나무들이 커다란 덩굴 이불을 쓴 채 한 덩이로 보이는 곳도 있다. 나무들을 볼 때마다 얼마나 갑갑한지 내가 전생에 나무였나 싶을 정도이다. 그런데 이탈리아의 나무들과 들판에는 그런 덩굴이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나무 한 그루 한 그루 모두 자신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나무들이 서로 적당한 거리를 두고 제 몫의 땅에 서서 제 몫의 햇빛을 받고 물을 빨아들이고 있는 것 같았다. 나도 나무이고 싶다. 적당한 거리를 둘 줄 알고 욕심내지 않는 나무로 살고 싶다.
부모의 역할이 언제쯤 끝날까요?
슬프게도 이 질문에 대답으로 들려오는 기간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예전에는 고등학교 마치고 성인되면요라고 했었다. 그리고 그다음에는 취업하고 결혼하면요로 바뀌었다. 그런데 요즘은 손주 다 키워주면요라고 바뀌고 있다. 부모조차 부모의 역할을 스스로 넓히고 있는 것 같다. 이 힘든 세상에 자녀를 내어 놓은 것이 못내 미안해 애프터서비스라도 잘해 보겠다는 심산인지는 모르겠지만 분명한 건 내 인생과 자녀의 인생의 경계가 모호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부모의 역할을 다하면 정말로 부모와 자녀 모두가 행복해지는지는 잘 모르겠다. 상담실에 가족 간의 갈등으로 오는 경우가 점점 많아지고 있는데 특히 손주 육아로 내 자녀와 갈등을 하는 노부부를 보면 참 안타깝다. 부모가 자녀를 못 놓는 것인지, 자녀가 부모를 못 떠나는 것인지는 개인의 사정이라 다 알 수는 없으나 분명 서로가 생각하는 경계와 책임의 범위가 달라지고 있는 것은 맞는 것 같다. 이럴 때면 눈에 보이지 않는 덩굴들이 마구 엉켜있는 것 같다. 답답해지고 갑갑해진다. 부모가 나무이고 자녀가 덩굴인지, 자녀가 나무고 부모가 덩굴인지 한 번쯤 살펴보는 게 필요한 요즘인 것 같다.
나는 내가 나무 같은 부모이길 바란다. 적당한 거리를 두고 아이를 지켜보고 묵묵히 곁에 있어 줄 수 있도록. 그리고 나는 내가 나무 같은 딸이고 싶다. 당신의 자랑이며 당신의 삶의 흔적으로 남을 수 있도록.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는 내가 나무 같은 아내이길 바란다. 나란히 서서 함께 새순을 돋아나게 하고 꽃을 피우고 조용히 물들어 가도록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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