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처음부터 잘 키우자 Oct 02. 2024

정오의 와인

불안해하지 않으며 누려도 되는 자유

 아름다운 시에나 대성당과 너른 공간에 여유를 가득 담아 놓은 캄포 광장 그리고 중세 거리를 걷고 걸었다. 쨍한 햇살 아래 뽀송한 바람을 맞으며 꿈인지 현실인지 알쏭달쏭한 기분에 오전이 훅 지나가버렸다. 어느새 시간은 정오가 되었고 이제는 점심을 먹으러 가야 한다고 했다. 식당으로 가는 길에도 오래된 건물들은 모든 곳에 즐비해 있었다. 건물들은 비슷하지만 서로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 내 눈에 가장 많이 보인 건물의 형태는 둥근 아치에 한껏 멋을 부린 벽면. 그리고 벽면 아래의 창문과 창문마다 걸려 있는 갤러리 덧창이었다. 어릴 때 그림을 그리라고 하면 난 실제로 본 적도 없는 갤러리 덧창을 늘 그렸었다. 이유는 단순했다. 그냥 어느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 봤던 유럽의 덧창이 예뻐 보였기 때문이다. 실제로 본 덧창은 예쁘다는 감상 위에 포근하다는 감상이 더해졌다. 덧창의 감상에 잠시 젖어 있다가 아치모양과 빼곡히 차 있는 벽돌 패턴이 어딘가 익숙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아득한 기억 속 창고를 여기저기 뒤져보니 백제의 무령왕릉의 내부의 패턴과 비슷하다는 걸 알아차렸다. 무령왕릉의 내부에는 날씬하고 키 작은 벽돌들이 가로와 세로로 모여 빼곡히 벽면을 만들고 있었다. 그 모습이 마치 도서관 서가 같다고 생각했는데 이곳의 건물들도 비슷한 느낌을 머금고 있었다. 그래서 일반적인 상가와 주택으로 사용되는 건물들도 도서관이나 성 같은 느낌이 많이 들었다. 건물 앞에는 약속이나 한 듯 밤을 밝혀주는 가로등이 있었는데 꼬불 둥글고 뾰족 날카로운 장식의 앙증맞은 철재 가로등이 거리의 운치를 더하고 있었다. 길에 즐비한 오래된 건물들로 인해 다음 장소로 이동하고 있지만 떠난다는 아쉬움이 전혀 들지 않았다. 그리고 일명 여행 스폿이라 불리는 곳이 아니라도 충분히 이탈리아를, 중세를 볼 수 있어 좋았다. 이게 바로 문화가 가진, 전통이 가진 매력이고 힘인가 보다.



 잠시 후 도로가 보이고 도로 옆 주차선 안에 경차들이 가득했다. 지나다니는 차 소리에 주위가 소란해지고 익숙하지만 언제나 불편한 담배연기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역과 식당들이 있는 곳에 도착한 것이다. 우리가 도착하자마자 식당 주방이 분주해지는 것이 보였다. 오늘 메뉴는 식전 빵, 햄을 곁들인 샐러드와 스파게티였다. 이탈리아 산 발사믹 소스와 올리브유, 토마토소스 등이 곁들여졌다. 역시 아는 맛이었다. 익숙한 맛이었다. 워낙 식문화가 발달한 우리나라라 웬만해선 어떤 나라의 어떤 음식도이라도 먹지 못할 이유는 없으니까. 그러나 음식이란 누구와 어디서 먹느냐에 따라 완전 달라지는 것이니까. 입에서 혀로만 느끼는 것이 아니라 마주 앉아 있는 사람을 눈으로 보고 주변의 소리를 귀로 들으며 느낌으로 먹는 것이니까. 분명 아는 익숙한 맛이지만 전혀 낯선 맛이었다. 음식이 입으로 들어가는 걸 느끼게 하는 맛이었고, 자신의 접시에만 집중하며 포크와 나이프가 여유롭게 움직이는 맛이었다. 햇살이와 요술이가 어렸을 때 함께 했던 식사와 비교가 되는 맛이 느껴지다니. 아마도 아이들에 대한 기억이 가장 선명하게 남은 것이 어린 시절이라 그런가 보다. 그만큼 치열하고 힘들었던 시간이었으니까.



 준비된 음식들은 선택불가였다. 이 여행은 패키지여행이니까. 그러나 늘 선택지는 있는 법. 행복한 선택 하나가 남아 있었다. 어떤 알싸한 알코올을 마실 것이냐. 나는 이탈리아산 레드와인을, 짝꿍은 시원한 맥주를 주문했다. 쨍그랑 두 잔이 가볍게 부딪히고 우리 집의 공식 건배사 '사랑합니다'를 외쳤다. 오늘은 집이 아니고 주변에 사람들이 있어 작은 목소리로 짝꿍과 나만 알 수 있게 살짝 외쳤다. 외침 다음에 바로 향긋한 알싸함이 입 안을 감돌았다. 물론 아는 맛이었다. 익숙한 맛이었다. 그러나 여긴 이탈리아고, 정오이고, 운전을 하지 않아도 되는 더욱이 챙겨야 할 아이들이 없다는... 아! 이 자유로움. 너무 좋은데 글로 다 표현이 안 되는 나의 필력이 안타까울 뿐이다. 그냥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입꼬리가 자꾸 올라가고 손이 빨라지고 눈앞에 보이는 술장에 있는 와인병에 시선이 자꾸만 가고 있다는 것으로 이 충만한 느낌을 대체하고자 한다. 아마도 이 글의 마무리는 와인을 마신 후에나 할 수 있을 것 같다.


역시 여행은 애들 없이... 허걱.


 와인의 붉은빛을 응시하다 나도 모르게 그만 마음의 소리가 입 밖으로 튀어나와 버렸다. 순간 두 아들과 동행한 부부가 있는 테이블 쪽으로 시선을 황급히 옮겼다. 혹시나 내 말을 들었으면 어쩌나 심장이 쿵 떨어졌다. 다행히 부부는 아이들과 식사 전쟁 중이라 다른 곳에 신경을 쓸 겨를이 없어 보였다. 정말로 다행이었다. 그리고 한편으로 여행 중에도 끊이지 않고 계속되어야 하는 육아를 보고 있자니 강 건너 불구경이지만 지침이 넉넉했다. 또한 동시에 저 부부는 얼마나 주변이 신경이 쓰일까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다행히 다들 관광객들이라 아이들의 소란스러움 정도는 너끈히 이해할 수 있을 정도의 마음의 여유가 있었고 우리나라와 같은 노키즈존이 없으니 그나마 좀 마음이 덜 불편했으려나 모르겠다. 사실 아이들은 아이들이라 소란스러울 수 있는데 문제는 아이가 아니라 아이들을 이해하지 못하는 어른이나 아이를 제대로 돌보지 못하는 부모의 문제가 아닌가 싶다. 노키즈존 대신에 개념 있는 어른들의 존을 만드는 게 맞을 것 같다. 그나저나 나의 와인은 어찌나 상큼하고 달큼하던지 입에 착 감긴다는 말이 이런 건가 보다. 이탈리아의 매직이었다.


 점심 식사가 끝나고 일어날 때쯤 여기저기서 전화 통화 소리가 들려오고 전화를 끊은 후 '우리 이래도 돼?'라는 말과 함께 행복한 웃음소리가 경쾌하게 들려왔다. 엄마 4명이 같이 온 팀이었다. 점심을 다 먹은 다음 아빠와 집에 있을 아이들에게 다들 굿나잇 전화를 한 것이었다. 집에 있었더라면 이 시간에 절대로 볼 수 없을 엄마들의 그 표정, 그 자유롭고 편한 미소, 넘치는 에너지를 사진으로 찍어 남겨 놓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다. 내가 만약 사진을 찍었다면 사진 아래에 이렇게 적고 싶다.

"내가 나로서 행복한 것과 너희의 엄마로서 행복한 것은 별개란다."
"얘들아, 내 사랑을 의심하지 말거라. 나도 너희에게 미안해하지 않을 테니... ㅋ"


 나의 핸드폰에서는 전화벨 대신 가족단톡의 알림음이 울렸다. 배달음식으로 잘 차려진 식탁 한 컷이 도착했다. 가족단톡에 대한 답으로 요술이에게 전화를 했다. 요술이는 첫마디에


"엄마. 낮에 친구들 불러서 내가 달걀찜 해 줬어.

친구들이 편의점에서 라면만 자꾸 사 먹어서 내가 해 줬어."


전자레인지로 달걀찜 하는 방법을 알려줬더니 온 동네 아이들을 다 불러 먹이고 있는 요술이인데 오늘도 역시나 그랬나 보다. 역시 아이는 우리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빨리 그리고 바람직하게 자라 있는 것 같다. 늘 어린것 같고 서툴러 보이고 못 미더워 확인하고, 했던 말을 하고 또 하는 부모는 자라는 아이의 속도를 따라갈 수 없나 보다. 요술이에게 멋지다는 말과 함께 나에게도 멋지다는 말을 해 주었다. 이 만큼 믿음직스럽게 잘 키웠으니까 말이다. 이제는 불안해하지 않으며 자유를 누려도 될 것 같다. 이 마음이 모든 부모에게도 가 닿기를 소망한다.





 

 글을 쓰다 말고 냉장고의 식재료들을 있는 대로 꺼내었다. 친구를 만나러 나간 햇살이를 빼고 나와 짝꿍과 요술이는 콘길리에 크림 파스타와 과일을 곁들인 늦은 점심을 먹었다. 그리고 짝꿍과 나는 와인을 곁들인 어른의 점심을 먹었다. 오늘은 화이트 와인이다. 뭐든 하고 싶은 걸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그리고 해도 되는 나른한 일요일 오후 2시가 참 좋다. 이런 시간이 오기까지 참 긴 시간을 종종거리며 애태우며 살았던 것 같다. 부모로 특히 육아를 하는 동안에 막연히 상상했던 나른한 일요일 오후는 나의 한줄기 숨구멍이었다. 이런 숨구멍이 있다는 것을, 숨구멍은 반드시 일상이 된다는 것을 지금 열심히 육아를 하는 부모들도 알고 있다면 참 좋겠다. 아이들과의 시간을 잘 버티고 맘껏 사랑할 수 있도록 말이다.


 나는 조금은 알딸딸한 기분으로 이 글을 쓰고 있다. 행복하다. 여행이 좋은 건 기억하고 있는 그 시간으로 나를 데려가 주기도 하고, 그날의 남겨진 여운이 오늘을 만들어 주기도 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그 기억은 언제 꺼내어 보아도 따끈한 김이 솔솔 나는 느낌일 것이기 때문이다. 나의 기억이 허락하는 한 영원히 그럴 것이다. 오늘처럼.




#이탈리아 #정오의와인 #점심 #양육독립 #육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