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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처음부터 잘 키우자 Sep 27. 2024

중세 거리를 걷다

박제되지 않은 과거

이탈리아에 가면 뭐 하고 싶어?
글쎄. 난 그냥 중세 거리를 걷고 싶어. 오랫동안 그곳에 살던 사람처럼 말이야.



시에나 대성당을 보기 위해 걸음을 재촉하며 잠시 후에 보겠다고 남겨 두었던 거리 곳곳을 새하얀 운동화를 신고 짝꿍과 손을 잡고 걷기 시작했다. 이 거리, 중세의 거리를 걸으면 어떤 느낌일까 오랫동안 상상하던 그 순간이었다.


바닥에 판판하게 깔린 돌들은 우리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탁탁 작은 소리를 내었다. 돌들과 나의 신발이 만들어 내는 탁탁 소리를 행진곡 삼아 타박타박 골목을 걸었다. 잠시 후 꼭 한번 손에 쥐어 보고 싶었던 고리를 발견했다. 건물 외벽에 일정한 간격을 두고 꽂혀 있는 고리, 바로 중세시대에 말고삐를 묶어 두던 그 고리였다. 손으로 가만히 잡아 보았다. 묵직한 느낌이 좋았다. 믿음직하고 반가운 느낌이 들었다. 이로 보아 아마도 나는 전생에 말이 아니라 마부였을 거라는 재밌는 생각이 들었다.



주변은 빛바랜 돌과 돌에 새겨진 세월의 흔적이 빼곡하였다. 단연코 주인공은 붉은색이었지만 그 옆에 알록달록한 깃발의 색과 따스한 감성에 젖은 희뿌연 회색과 노르스름한 색들이 단조롭지 않은 풍경을 이루고 있었다. 높지도 낮지도 않은 건물들 사이사이로 좁은 골목들이 미로처럼 연결되어 있었고 가끔씩 비둘기가 좁은 골목을 비행하기도 했다. 비둘기가 내 머리 위를 스치듯 비행할 때 난 성당의 종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골목을 따라, 돌로 된 건물을 따라 올려다본 하늘은 쨍하게 파랗지만 건물들 사이사이는 그늘져 있어 서늘함이 느껴졌다. 밝음과 어둠이, 따듯함과 서늘함이 적절히 어울려진 풍경이었다. 그 풍경 안 사람들의 모습은 오늘이지만 거리의 모습은 오래된 어제, 중세에 머물러 있었다. 적당한 어둠과 서늘함이 중세의 분위기를 한껏 느끼게 하는 것 같았다.  


중세의 거리를 걷는 느낌은 조금은 고즈넉하고 어쩌면 조금은 쓸쓸할 것 같았다. 그런데 아니었다. 좁은 골목에 가득한 여행객들의 표정에는 감탄과 웃음이 가득했고 그곳에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늘 그렇다는 듯이 새로울 것 없는 일상을 살고 있었다. 오히려 활기차고 안온한 느낌이었다. 그런데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분명 빠뜨린 건 없는데 뭔가 빠진 듯한 그러나 너무 편안한 느낌이 계속 들었다. 느낌의 원인을 나도 모르게 찾고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바로 찾게 되었다.


흔하게 보이는 '체험'이 없었다. 아마도 이 중세의 거리가 우리나라에 있었다면 난 아마 화려한 장식이 있는 여러 겹의 풍성한 치마를 입고 과일이나 꽃이 한가득한 모자를 머리에 얹은 채 장갑을 낀 손으로 부채를 들고 거리 곳곳에서 사진을 찍었을 것이다. 그리고 짝꿍도 나의 성화에 못 이겨 타이트한 하의에 어깨가 풍성한 상의를 입고 멋스러운 모자를 쓰고 함께 사진을 찍었을 것이다. 어색해하며. 그런데 여긴 그런 과거를 재현한다는 것 자체가 어색한 것 같았다. 이곳은 과거가 과거가 아닌 현재이니까. 박제된 문화재가 아니니까. 대학시절 유홍준 교수님의 강의 한 토막이 생각났다. 문화재는 문화재로 구경할 때 보다 사람들의 삶과 함께 할 때 더 오래 보존된다고, 사람의 온기가 문화재를 더 오랫동안 간직하게 한다고 했다. 그래서 이곳은 2024년이지만 중세의 건물과 거리가 그대로 살아 있나 보다.




카페와 서점 그리고 아기자기한 소품들과 젤라또를 파는 가게들이 줄지어 있는 여러 갈래의 골목들을 지나 조금 경사진 골목을 만났다. 경사진 골목의 양쪽에는 마치 개선문처럼 건물이 서 있었고 건물에 걸려 있는 깃발이 분위기를 한껏 들뜨게 만들었다. 곧 보게 될 곳을 기대하게 만들었다. 감탄의 시선이 모인 골목 끝에 어둠이 아닌 햇빛이 한가득한 공간이 나타났다. 짝꿍과 나는 드디어 걷고 걸어 캄포 광장에 도착한 것이었다. 광장에는 사람들이 가득했다. 부채 모양의 광장을 마구 달려보고 싶은 충동이 느껴질 만큼 넓고 탁 트여 있었다. 건물들이 광장을 빙글 돌며 세워져 있었지만 결코 광장 안에는 너른 풍경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광장은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라는 것을, 비워져 있어야 새로운 담론들을 다룰 수 있다는 것을 시각적으로 명확히 보여주고 있었다. 너른 광장에 앉아 말달리기 경주와 들썩이는 응원 소리를 상상해 보고, 깃발을 든 사람들의 절박한 외침을 상상해 보며 진짜로 그곳에 살던 아니 사는 사람인 듯이 여유를 누려 보았다. 바닥에 앉아 하늘을 보는 게 이렇게 자연스러울 줄이야.



온갖 상상과 여유로운 한 때를 보내고 있는데 어디선가 시끌시끌한 개구쟁이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익숙한 소리였다. 반가운 마음에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 소리의 주인을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광장에 있던 많은 사람들이 다 같이 소리의 주인을 쳐다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엄마 미소와 아빠 미소를 장착한 채로. 주인은 바로 수학여행을 온 것 같은 초등학생부터 중고등학생으로 보이는 아이들이었다. 광장에 있던 사람들은 갑작스럽게 들이닥친 아이들의 생기 넘치는 밝은 에너지에 잠시 넋을 놓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각자의 아이들을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과연 어떤 마음일까.


더 많이 배워 알아야 하고, 더 멋진 모습으로 성장해야 한다고 말하며 성장한 이후의 모습을 목적지로 삼고 오늘의 이 예쁨과 사랑스러움을 그냥 지나친 것은 아닌가 아까운 생각이 들었다. 시에나 대성당을 보기 위해 잠시 미뤄 두었던 거리들처럼. 그래도 거리는 그냥 그곳에 있으니 언제나 다시 돌아와 걸어도 되지만 아이들의 성장 과정은 잠시라 예쁘게 바라보는 걸 미뤄두면 곧 사라져 버리게 된다. 아이의 성장 과정과 그 성장을 함께 한 시간과 추억이 사진으로 박제되어 앨범의 한 자리를 차지하게 두지 말아야겠다. 먼 훗날 결괏값으로 성장한 모습이 멋진 것도 좋지만 오늘의 그 예쁨과 사랑스러움도 시에나 대성당을 바라보는, 캄포 광장을 바라보는 마음 보다 더 진한 마음으로 바라봐야겠다. 더 커버리기 전에. 아마도 캄포 광장의 여유로움이 내 마음속에 들어왔기 때문에 이런 마음도 생기는 것 같다. 그래서 아이들을 키우는 부모들에게도 광장이 필요한 것 같다. 캄포광장과 이 중세의 거리들을 머릿속에 꾹꾹 눌러 담은 다음에 집으로 돌아가 다시 일상에서 만나게 될 부모들에게 텔레파시로 쏘아 주어야겠다.




#이탈리아 #캄포광장 #여행 #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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