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처음부터 잘 키우자 Oct 23. 2024

다디단 에스프레소

그리고 여유로웠다.

설탕을 갈색 거품 위에 뿌린다. 설탕이 녹을 때까지 잠시 기다린다.

한 모금을 마신다. 달다.

나머지 설탕을 또 뿌린다. 설탕이 잘 녹도록 스푼으로 살짝 젖는다.

한 모금을 마신다. 달다. 깊다. 향기롭다.

그리고 여유롭다.



사람들이 이탈리아에 가면 에스프레소를 꼭 한 번 마셔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오르비에토에 도착했을 때 그곳에 있는 작은 카페에 들렀었다. 내부에는 커피 향이 가득했고 와인잔과 와인병도 보였다. 그리고 와인병에 꽂혀있던 코르크 마개가 벽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코르크로 장식된 벽은 따뜻한 느낌을 가득 풍기고 있었다. 필요를 다 한 코르크 마개가 이렇게 멋진 인테리어가 된 걸 보니 어떤 것이라도 쓸모없는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카페라면 우리나라에도 무수히 많은데 이탈리아도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카페마다 단골이었던 유명한 사람들의 일화도 참 많았다. 오래된 건물들이 그대로 유지되어 있고 그 속에서 사람들이 여전히 삶을 이어나가고 있기 때문인 것 같았다. 그리고 우리나라 카페에서는 볼 수 없는 것이 하나 있었다. 카페 앞 노상에 있는 스탠드형 테이블이 그것이다. 서서갈비도 아니고 에스프레소를 서서 홀짝홀짝 마시고 간다니 참 신기했다. 짝꿍과 나는 카페에 앉아 에스프레소를 주문했다. 이탈리아에서 맛보는 에스프레소는 어떨지 궁금했다.



 내가 처음으로 커피를 마셔 본 것은 중학교 때쯤이었던 것 같다. 달고 향기가 있었는데 너무 단 게 싫었었다. 색깔도 갈색이라 흙탕물처럼 보였고 무엇보다 다 마신 후 속이 쓰렸었다. 그러다 시간이 흘러 스무 살 대학 새내기 시절에 어른들의 흉내를 내며 카페에서 호기롭게 에스프레소를 주문했었다. 왠지 좀 있어 보이는 메뉴라 선택했었다. 그러나 맛은 절대로 있어 보이지 않았다. 너무 썼다. 그래도 있어 보이게 한 잔을 다 마셨다. 마음 같아선 설탕을 달라고 하고 싶었으나 그냥 먹는 것인 줄 알고 설탕을 요청하지 못했었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에스프레소에는 설탕을 넣어서 마시는 것이었다. 물론 개인의 취향에 따라 설탕을 안 넣을 수도 있지만. 나도 그렇고 친구들도 그렇고 그 시절 커피에 대해 서로가 알지 못했기에 속 쓰림은 우리 각자가 감당해야 할 몫이었다.


에스프레소 잔 옆에 다정하게 그리고 당연하게 놓여있던 설탕이 커피 속으로 녹아드는 모습을 보며 카페 의자에 앉아 있었는데 머리카락을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이 참 좋았다. 나른한 오후 커피 한 잔의 여유러움이 좋았다. 그동안 마셨던 커피는 일을 시작하기 전에 마음을 가다듬는 용도로, 육아를 할 때에는 바닥으로 꺼질 것 같은 에너지를 다시 올리기 위한 용도였다. 말 그대로 해야 하는 것을 잘하기 위해 일명 '한도 초과할 때까지 때려 붓는 것'이었다. 당연히 맛을 음미할 여지도 없었다. 그런데 오늘은 설탕이 제 몫의 일을 다 할 때까지 기다려주었고, 와인을 마시듯 커피를 입안에서 굴려보고 코로 향기도 맡아보았다. 진한 향기가 느껴진다.


그래, 커피는 이런 맛이지. 여유로운 맛.





#이탈리아 #에스프레소 #커피






이전 17화 나무로 살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