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르고 불리는 대로 우린 늙어가는 걸 거야.
파란빛 하늘이 점점 붉은빛 하늘로 바뀔 때쯤 호텔에 도착했다. 피곤함도 즐거웠다. 편히 쉴 수 있는 즐거움이 남았으니까. 노곤한 몸을 이끌고 서로에게 목례를 하며 각자의 방으로 올라가려고 할 때 예상치 못한 질문이 날아왔다.
신혼부부인가요?
어머...
짝꿍 찾기 예능에서 하듯 서로의 배경 정보 없이 함께 여행을 하는 며칠이 지났다. 처음에는 서로 간의 낯섦으로 분명 조심조심하는 분위기였다. 말을 할 때에도 같이 온 사람들과 속닥거리는 정도였고 어쩌다 눈빛이 마주치면 어색하게 목례를 하는 정도였다. 그러다 며칠 패키지여행으로 묶여 다니다 보니 슬슬 친밀감이 생기며 서로 어떤 사람들인지 궁금증을 풀어 보고 싶어 졌던 것 같다. 신혼부부냐는 첫 질문에 너무나 당황스러웠다. 우린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2002년 월드컵 커플로 사귀기 시작한 지 6개월 만에 결혼을 하고 올해 대학을 간 첫 아이와 초등학교 졸업을 앞둔 둘째를 둔 무려 23년 차 부부였기 때문이었다. 그래, 요즘은 워낙 늦게 결혼하는 사람들이 많으니 늦깎이 결혼을 한 나이 많은 신혼부부라고 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 한편으로는 우리가 절대로 아이들 이야기를 하지 않고 있구나라는 생각도 들었다. 햇살이가 가족 단톡에 남긴 '여행에 집중하세요.'라는 말을 우린 그렇게 철저하게 실천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충분한 해방감으로. 더불어 그렇게 다정해 보였다니 우리가 너무 친한 척 연출을 하지는 않았나 하는 자기 검열의 시간도 가져보았다. 결론은 연출보다는 익숙한 새로움이었다. 새로움은 설렘이 되었고 설렘은 과거의 우리의 모습을 소환했다. 그건 자연스러웠으나 당연하지는 않은 것이었다. 분명 서로에게 노력해 온 우리 관계의 결과물인 것이다.
우리가 단연코 모든 순간 이렇게 달달한 부부는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나름 불타는 연애를 거치고 좋아 죽어 결혼을 했지만 늘 좋기만 한 것은 절대 아니었다. 둘 만의 문제가 아니라 주변 사람들의 문제로 다투기도 했고, 서로에 대한 오해와 서운함, 서로 다른 생각과 생활방식으로 날카로웠던 날도 있었다. 4계절을 다 지내보고 결혼해야 한다는, 선배들이 가슴 밑바닥으로부터 토해내는 말의 의미를 새삼스럽게 진리라 느낄 만한 일들도 많았다. 우린 생활 온도부터 달랐기 때문이었다. 겨울은 행복했다. 짝꿍이 짜증을 안 부려서. 그런데 여름은 힘들었다. 짝꿍이 짜증을 부려서. 짝꿍은 더위에 매우 취약했고 더울 때면 일명 인격이 변했다. 물론 나도 그랬다. 나는 여름은 그럭저럭 괜찮았다. 그런데 겨울이 되면 나도 짝꿍과 똑같이 인격이 변했다. 추위는 거의 뇌정지를 불러올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렇게 뾰족 뾰족한 날은 지겨울 만큼 많았다.
그러나 그렇게 뾰족 뾰족한 날이라도 우리가 서로에게 반드시 지켜온 것이 있다. 서로를 부르는 호칭. 호칭은 그냥 아주 형식적일 때도 있지만 사람과의 관계, 그 사람을 신뢰하고 인정하는 정도, 관심과 애정의 농도를 알 수 있는 바로미터인 것 같다. 그래서 어떻게 부르는지, 어떻게 불리는지가 중요한 것 같다. 부부도 부모와 아이도. 그러니까 커플이 되면 자기들만의 애칭을 만들고, 아이가 태어나면 비싼 돈을 주고 유명한 작명소를 찾아다니며 이름을 짓는 것일 것이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내가 만난 아이들 중 많은 아이들은 자기의 이름이 세상에서 제일 싫다고 했다. 성을 딱 붙여서 세게 불려지는 게 대부분이기 때문이란다. 집에서 조차. 신기하게도 아이들은 그렇게 싫은 이름이지만 또다시 불려지길 바라고 있었다. '00~~~~~' 이렇게 말이다. 성 떼고 이름에 물결이 잔뜩 들어간 다정한 이름으로 말이다.
우리 부부는 처음부터 어떻게 부르자, 어떤 말로는 절대로 부르지 말자라고 약속을 한 적은 없었다. 그냥 자연스럽게 정리가 되었었다. 아직까지 여보라는 말은 하지 못하고 있다. 아마도 앞으로도 계속 못 할 것 같긴 하다. 너무 어색하고 이상해서. 늘 그렇듯 '자기야~'라고 부르고 있는데 아마도 할머니 할아버지가 되어도 우린 서로를 이렇게 부를 것 같다. 자기라고 부르면서 싸우거나 욕을 하지는 못할 것 같으니 아마도 앞으로도 계속 다정하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예측을 해 본다.
우리가 서로에게 한 노력이 호칭만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분명 호칭이 서로가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분명히 그어 주고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우린 아직 부부로 남아 있다. 그리고 앞으로도 부르고 불리는 대로 우린 늙어 갈 것이다. 그리고 그리고 그리고 아주 고운 노을로 기억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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