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존감 = 성취 수준 / 야망
어떤 날은 높아졌다가 어떤 날은 낮아지기도 하는 자존감을, 아무런 가치판단도 없이, 있는 그대로 편안하게 보아줬으면 좋겠습니다.
자존감이 높아진 사람들의 뇌를 들여다보면, 보상적인 쾌락 경험과 관련한 뇌 영역이 자기개념을 담당하는 뇌 영역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습니다. 즉 칭찬을 들어 즐거움을 경험하면, 이것이 뇌의 쾌락 영역뿐 아니라 자기 자신에 대한 정보를 처리하는 뇌 영역에도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높습니다.
'척'은 어느 순간 여러분에게 안정적이고 효과적인 '가면'을 만들어줄 것입니다.
(우리의 가면은 낮은 자존감에서 비롯한 가식도, 타인의 비위를 맞추려는 위선도 아닙니다. 그저 지혜롭게 살아가는 데 필요한 삶의 기능이자 기술일 뿐입니다.)
'발끈'의 동의어는 '낮은 자존감'인 것입니다.
불안이 높은 사람들이 가장 싫어하는 속담 하나가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입니다. '아니, 어디로 갈 줄 알고 모로 무작정 가라는 거지?'하는 반발심이 절로 듭니다. 반면에 그들이 가장 좋아하는 속담은 '돌다리도 두들겨보고 건너라'입니다. 하지만 굳이 두드리지 않아도 되는 돌다리들이 있습니다. 대충 갈 수 있으면 그냥 대충 가세요.
따지고 보면 그렇게까지 완벽할 필요도 없고, 완벽할 수도 없습니다.
완벽주의는 긍정적인 정서 경험과 결합할 때 가장 좋은 성과를 냅니다. 완벽을 기하려는 자기 모습에 즐거워하고, 완벽 '비스무레'한 상황에 즐거워하고, 완벽하지 못한 결과에 남 일인 듯 깔깔댈 때 완벽주의는 '최적의 결과'를 가져옵니다.('완벽한 결과'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어차피 그런 건 어디에도 없습니다. 특히나 완벽주의자의 뇌에는.)
내가 그 일을 해내면 좋겠지만, 아니면 마는 것입니다. 내가 그 사람 마음에 들면 좋겠지만, 아니면 마는 것입니다.
이번의 시도가 좋은 결과를 가져오면 좋겠지만, 아니면 또 마는 것입니다. 어쩌다 나의 노력 덕분에 일이 잘 된다면, 나는 작은 자기 효능감 하나를 챙기고 다음 일을 도모하면 됩니다.
만일 안 된다면? 그러면, 그냥 마는 겁니다.
내가 할 수 있는 노력을, 내가 불행해지지 않을 정도로만 다한 후에 '그래서 어쩌라고?' 정신으로 다른 즐거움을 찾아내어 즐기면 됩니다.
총량이 제한된 당신의 시간과 에너지를, 사소한 사건에 불쾌감과 억울감을 드러내는 데 사용하고 있다가는 이후의 삶이 실제로 억울해질 수 있습니다.
머릿속 생각들이 유기적으로 얽혀 생산적인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건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뜬금없는 의심과 추정이 자기가치감, 자존감, 효능감에 얽히고설켜 발목을 잡아채고 아래로 끌어내리는 것은 삶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분노를 표출할 때, 나의 모든 감정 반응은 분노로만 집중됩니다. 외로움, 슬픔, 묘한 안도감 같은 또 다른 감정들을 돌아볼 새가 없기에, 이 감정들이 줄 수 있었던 메시지를 스스로 수신하지 못합니다. 분노 아닌 다른 감정 경험에서 뜻밖의 통찰이나 지혜를 얻을 기회가 박탈되는 것입니다.
마땅히 흘려보내야 할 정보들을 혼자서 손에 꽉 쥔 채 계속 분노에 차 있다면, 그 손이 당장 다른 곳에 필요할 때 우두커니 주먹만 쥐고 서 있어야 하겠지요.
당신의 정서적, 인지적 에너지는 한정적인데 여전히 실망하고 화내는 데 에너지를 쏟고 있으니 말입니다.
"왜 해야 하지?"
'왜?'가 어디 있어요. 그냥 하는 겁니다.
나 말고는 다들 되게 생각 있어 보이고 의미 있는 삶을 살아가는 것 같지만 사실 그렇지 않습니다. 삶에 뭔가 큰 의미가 있어야 한다는 믿음은, 누군가의 삶에 도움이 되는 기능적 요소라기보다는 상처 입고 고단했던 자기애가 남긴 하나의 증상 같은 것입니다.
나에게 뭔가 의미 있는 일이 있었다고 해도, 그것이 결과물은 아니었습니다. 그건 모든 과정이었습니다. 내가 살아낸 과정, 나와 당신을 공부한 과정, 내가 당신과 함께한 과정, 그 모두가 내 삶의 의미였습니다.
우연에서 비롯한 유전적인 조합들, 우연히 함께하게 된 가족과 주변 사람들, 그리고 우연한 기회의 학습 경험들이 당신의 많은 부분을 결정해왔습니다.
당신을 절망하게 했고 당신이 저주했던 어떤 요인은 당신이 간과한 당신 행운의 일부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