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묵히 지루함을 이겨내는 연습

[29일 차] 팔라스 데 레이 > 아르주아

by Zorba

[Day 29] Palas de Rei > Arzua


이제 순례길을 걸은 지 한 달 정도가 된 이 시점에서, 사실 기상 시간이 조금씩은 늦어지고 있다. 그래도 언제나 7시 전에는 알베르게를 나오려고 애쓴다. 팔라스 데 레이를 얼마 지나지 않아서 길 우측에 덩그러니 불이 켜진 카페를 발견한다. 어제 부산 친구가 구글 지도에 리뷰가 몇 백개인데 평점이 5.0이라고, 여기는 꼭 가야 한다고, 귀에 피가 나도록 얘기한 곳이다. The Essential Coffee Home. 밖에서 먹으려고 자리를 잡자마자 빗방울이 기다렸다는 듯 떨어진다. 도로 가방을 들고 안으로 들어가서 간단한 브런치와 커피를 주문한다. 이윽고 순례길에서 만난 익숙한 얼굴들도 하나둘 카페로 들어온다.


모든 것이 완벽했는데 주인아저씨가 양 조절을 잘 못하시는 듯하다. 나와 부산 친구 둘 다 웬만하면 다 먹는데, 정말 오랜만에 음식을 남긴다. 이것은 도저히 아침으로 한 사람이 먹을 수 있는 양이 아니다. 속이 든든한 걸 넘어서 배가 터질듯하다. 이건 무조건 걸으면서 소화시켜야 한다. 오랜만에 신선한 목적을 가지고 순례길을 시작하는 하루다. 몇 시간 정도 지났을까. 규모가 제법 있는 마을에 도착하는데, 이곳에 지나치는 가게마다 솥에서 건진 문어를 내밀며 '뽈뽀'를 외치고 있다. 사실 한국인이라면 지나칠 수 없는 비주얼이었지만, 아직도 배가 꺼지지 않아서 가볍게 무시하고 발걸음을 옮긴다. 대신 근처 카페에서 추로스와 젤라또로 당을 충전한다.


오랜만에 나, 부산 친구, 대구 동생 이렇게 셋이 나란히 걷는다. 중간중간 서로 떨어져 있는 시간도 많았지만, 그래도 처음 만난 날로부터 벌써 4주라는 시간이 흘렀다. 어느새 정이 참 많이 들었다. 남자는 운동을 하며 땀을 같이 흘리면 쉽게 친해질 수 있다고 했던가. 힘든 길을 함께 걷다 보니 우리는 예전부터 알고 지낸 사이처럼 친한 친구가 되어있었다. 서로 멀리 살아서 한국으로 돌아가면 자주 못 본다는 게 아쉬울 정도이다.


이제 산티아고까지 50km도 남지 않았다. 끝나지 않을 것만 같던 이 길도 이제는 서서히 끝이 보이기 시작한다. 우리는 서로 앞으로의 계획을 묻는다.


"우리 이제 낼모레면 산티아고 도착하는데 그다음 일정이 어떻게 돼 다들?"

"나는 산티아고에서 하룻밤 자고 포르투 갔다가 여행 좀 하고 한국 복귀."

"저는 피스테라, 묵시아 찍고 포르투로 이동한 다음, 거기서부터 다시 산티아고까지 걸어가려고요."

"나는 아직 정하지 못했는데 포르투는 무조건이고, 귀국 비행기는 바르셀로나에서 타서 거기도 잠깐 여행할 듯?"

"그럼 우선 포르투에서 보는 걸로."

"거기 기가 막힌 한식집이 있다는데 거기서 저녁 한 끼 하시죠 형님들."


그렇게 우리는 헤어짐을 조금이나마 뒤로 미룰 수 있었다. 그렇게 우리는 사내 남자애들이 할 법한 별것도 아닌 시시콜콜한 얘기들로 웃고 떠들며 어느새 큰 다리를 지난다. 햇살을 등진채 도로 위에 새겨진 우리 셋의 그림자를 보고 있자니 정말 마지막이 다가오고 있음을 실감하게 된다. 손을 흔들어보며 미리 작별인사를 준비해 본다.


사실 오세브레이로를 넘은 후로부터 순례길이 급격하게 지루해지기 시작했다. 길의 풍경도 익숙하고, 지나는 마을도 이젠 다 비슷비슷하게 보인다. 좋게 얘기하면 이 길에 적응하게 되었다. 나쁘게 얘기하면 흥미를 잃게 되었다. 이제 사실 새로운 것을 기대하기는 힘들다. 매 순간을 지루함과의 싸움에서 이겨내야 한다. 그러나 다행히도 시간은 흐르고, 어느새 하루가 지나게 된다. 자기 전에 요즘은 이런 생각이 든다. '나는 오늘 하루를 잘 보낸 것일까?'


산티아고에 오기 전 한국에 있었을 때는 자책을 되게 많이 했던 것 같다. 반복적인 일상 속에서 그냥 기계처럼 살다 보면 내가 지금 뭐 하고 있나 회의감에 빠지곤 했다. 근데 이 낯선 타지에서는 조금씩 긍정적으로 사고하는 법을 배우고 있다. 이를 통해 나는 묵묵히 지루함을 이겨내는 연습을 하고 있다. 나에게 관대해져도 된다. 그동안 지나칠 정도로 엄격했다.


'걷기와 쓰기. 적어도 이 두 가지는 여기 와서 한 번도 빼먹지 않고 꾸준하게 해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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