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미노는 사람을 모으는 힘이 있다

[27일 차] 사리아 > 포토마린

by Zorba

[Day 27] Sarria > Portomarin


팜플로나에서 만난 대구 형님이 있었다. 본인은 몇 년 전에 순례길을 한 번 걸었는데, 그때 기억이 좋아서 또다시 이곳을 찾게 되었다고 말해주셨다.


"지난 순례길에는 어디가 가장 기억에 남았나요?"

"포토마린. 마을이 되게 아름다웠어."


순례길 초기에 들었던 이름이라 까먹지 않고 있었는데, 오늘이 되어서야 드디어 포토마린에 가보게 된다. 전날 묵었던 사리아 알베르게 근처에 괜찮은 카페가 하나 있는 것 같아 우선 그곳으로 향한다. 사실 스페인 대표 커피인 카페콘레체는 대안이 없어서 마시는 것이지 그 특유의 싱거운 맛을 그리 선호하진 않는다. (물론 제대로 만드는 카페콘레체는 다를 수도 있지만 아직까진 먹어보지 못했다.) Guayoyo specialty Coffe Roastery라는 이름의 이곳은 딱 봐도 순례길에서 쉽게 마주할 수 없는 유형의 제대로 된 카페처럼 보인다. 사실 '커피가 다 거기서 거기지'라는 생각이 만연했었는데, 하트 모양의 라테아트가 그려진 커피를 한 잔 마시는 순간 행복이란 참 상대적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한국에 있을 때는 그렇게 평범했던 라테가 2주 내내 카페콘레체만 마시던 나의 입 안에 들어오자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커피로 변해버렸다.


카페 문을 나서니 오늘도 붉게 물든 하늘을 마주하게 된다. 앞에 보이는 건물의 통유리창 사이로 반사되는 빛에 눈이 부시기도 하다. 이렇게 새벽녘이 아름다운 날이면 평소보다 하늘을 자주 올려다본다. 그러다가 오늘은 운이 좋게도 저 멀리 구름을 뚫고 선명하게 뻗어있는 무지개를 발견한다. 지난번에 혼자 무지개를 봐서 아쉬웠는데, 부산 친구와 드디어 같이 보게 되니 마음이 한결 홀가분하다. 점점 어두워지는 구름이 무지개를 가리기 시작하다가 결국 한 뼘 정도만 간신히 언덕 위에 걸치게 놔둔다. 그 모습이 흡사 북유럽신화에서 신계 아스가르드로 통하는 무지개다리 같아 보인다. 왠지 저걸 타고 오르면 하늘나라에 다다를 수 있을 것만 같다.


그렇게 평소보다 긴 시간 동안 하늘을 올려다보니 어느새 사리아를 벗어나 있다. 20분 정도 걸었을까. 반팔을 입은 친구가 씩씩하게 우리를 앞질러간다. 쌀쌀해진 요즘 모두가 각자의 방법으로 무장을 하고 나서는데, 혼자만 여름인 저 녀석은 누가 봐도 데이빗이다. 순례길에서 가끔 지나가면서 인사하는 아일랜드 출신의 친구인데, 엊그제 저녁 알베르게에서 처음으로 길게 대화를 했다. 데이비드는 시골에서 아버지를 도와 송아지를 키우는 일을 하고 있다. 대부분의 시간을 사실 가족과 보내기 때문에 여기 순례길에 와서 다양한 사람들과 이야기하는 것이 낯설고 재밌다고 하는 순수한 친구다. 그런데 앞서 나가는 데이비드를 보고 부산 친구가 고개를 갸우뚱한다.


"쟤가 입고 있는 저 바지. 내가 이 주 전에 알베르게에서 잃어버렸던 그 바지 같은데?"

"아 그 탈부착되는 디테쳐블 팬츠인가 그거? 에이 설마 훔쳤겠냐."

"노스페이스인 거 보니까 아무래도 내 거 맞는데. 내가 빨래 널어놓고 까먹고 안 가져갔거든."

"한 번 물어보기나 해 봐."

"나 영어 잘 못하는데 네가 해줘."

"싫다. 이번 기회에 외국인이랑 얘기 좀 해봐라. 여기 와서 한 번도 안 해봤잖냐."

"서울 애들은 이렇게 정이 없다."


그렇게 부산 친구는 투덜대며 앞서가는 데이비드를 따라잡으러 간다. 용건만 물어보고 금방 돌아올 줄 알았는데, 꽤나 오랜 시간 옆에서 대화를 하고 있는 모습을 보니 괜히 뿌듯하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저 멀리 오두막같이 생긴 쉼터가 보인다. 내가 도착하니 데이비드와 부산 친구 외에도 어제 알베르게에서 만났던 조셉이라는 프랑스 친구가 미리 와있다. 마침 쉼터 내에 자판기가 있어서 우리 넷은 각자의 콜라를 뽑고 건배를 한 후 잠시 목을 축인다. 가방을 내려놓고 벽에 기대어 목구멍에 탄산을 때려 넣는 중에 소떼가 우리 앞을 지나간다. 동시에 예상치 못한 배변활동이 후각을 강타하며 모두의 눈살을 찌푸린다. 조셉이 프랑스식 영어 발음으로 욕을 하는데 그보다 찰질 수가 없다. 급작스레 종료된 달콤한 휴식시간을 뒤로한 채 우리는 다시 각자 갈 길을 떠난다.


부산 친구는 자기 바지가 맞았다며 내 눈을 틀리지 않았다고 한다. 산티아고 오기 직전에 산 새 바지라 잃어버리고 계속 생각났는데, 이렇게 다시 되찾게 될 줄 몰랐다며 오랜만에 신난 표정을 하고 있다. 내가 데이비드랑 무슨 얘기를 그렇게 오래 했냐고 묻자, 그냥 이것저것 서로에 대해 물어보고 대답하다 보니 어느새 몇 킬로나 걷게 되었다고 말해주었다. 부산 친구가 드디어 외국인과 30분 이상 대화했다는 사실에 내가 다 뿌듯했다.


그나저나 그 노스페이스 바지는 내가 보기에도 꽤 괜찮은 거 같아서 모델명을 물어봤다. 순례길 덕분인지 요즘 들어 부쩍 아웃도어에 관심이 많아졌다. 사실 순례길에 가기로 결심한 순간부터 바람막이는 꼭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여러 후보군을 놓고 고민을 했다. 그러나 바로 직전 회사 동기들과 함께 떠난 삿포로 여행에서 엄청난 규모의 몽벨 매장을 들르게 되었고, 운명처럼 짙은 갈색 스톰크루저 모델을 구매하게 되었다. 가끔 어떤 옷은 나와 잘 어울리고 편해서 손이 자주 가곤 하는데, 이 바람막이는 손이 가기도 전에 이미 자연스레 입고 있는 그런 녀석이다. 또 로그로뇨에서 구매한 밤색 비니와 함께 순례길에서 나를 나타내는 상징과도 같은 물건이 되었다.


옷은 나라는 사람을 나타내는 가장 직접적인 수단이다. 개인적으로 본인만의 스타일을 알고 그에 맞는 옷을 입는 사람은 길에서 마주치더라도 괜히 한 번 더 뒤를 돌아보게 한다. 나는 어떤 스타일을 추구하고 있나 고민해 보지만, 그것을 고민하는 행위 자체가 명확한 스타일이 없다는 것을 의미하므로 이내 포기한다. 다만 순례길을 걸으면서 수많은 자연의 아름다운 색들을 마주하는데, 문득 내가 가지고 있는 옷들도 그들과 굉장히 비슷함을 깨닫게 된다. 매일 같이 등장하는 푸른 하늘, 하얀 구름, 초록 나무, 흙, 돌. 내 옷장을 열어보면 대부분의 반팔은 흰색이고, 모든 재킷과 바지는 청색, 녹색, 갈색 계열 중 하나이다. 어쩌면 나는 자연스럽게 보이는 옷을 좋아하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한국에 돌아가면 순례길에서 매일같이 마주한 자연의 색조합을 참고해서 옷을 입는 것도 재밌을 것 같다.


어느새 저기 큰 다리 건너에 있는 포토마린이 보인다. 마을 앞에 큰 강물이 흐르고 있는 것을 보고 있자니, 지금까지 봤던 다른 마을들에 비해 조금은 특별하게 느껴진다. 앞도적인 다리의 높이가 더욱 극적인 효과를 만들어 내는지도 모르겠다. 마을에 도착해서 길을 걷는 중 간판에 '울트레이아'라고 적힌 알베르게가 있길래, 이름이 마음에 들어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곳으로 들어갔다. 재정비를 하고 이 작은 언덕 마을을 둘러보다가 또 하나의 '제대로 된' 카페를 발견한다. 따뜻한 햄치즈토스트와 생과일주스를 함께 먹으니 이보다 편안한 휴식이 있을까 싶다. 확실히 사리아 이후로부터는 관광객이 많아지니 이 마을들도 신경을 쓰는 건가 하는 합리적 의심이 들기도 하다. 뭐가 되었건 좋은 커피와 맛있는 음식만 있으면 되지.


언덕 마을에서 내려다보는 탁 트인 시야의 노을은 당연하듯이 아름답다. 숙소에 마치 테라스가 있어서 자리에 앉아 주홍빛 하늘을 감상한다. 옆에는 순례길에서 자주 마주했던 프랑스 할아버지가 홀로 와인을 드시고 계신다. 눈을 마주치자 와인병을 들어 올리며 권하신다. 잽싸게 주방에서 와인잔을 가져와 그분 옆에 앉는다. 미셸이라는 이름의 할아버지는 나무조각가이다. 아주 멋있는 나무 지팡이를 가지고 다니시길래 어디서 샀는지 매번 궁금했는데, 알고 보니 본인이 만든 거였다. 순례길에는 이번이 7번째라고 하신다. 영어를 못하셔서 우리는 매번 대화할 때마다 핸드폰에 말하고 번역된 글자를 서로에게 보여주는 방식으로 대화를 했는데, 불편함은커녕 오히려 재미있다. 다만 놀라웠던 것은, 그 할아버지의 말 하나하나가 핸드폰을 타고 그 스크린으로 보일 때마다 나도 모르게 '아' 하는 작은 탄성이 나오는 것이다. 모든 문장에서 그의 품위가 드러나기 때문이었다. 굉장히 겸손하고, 다른 사람을 존중할 줄 알고, 무엇보다 선택하는 매 단어가 아름답게 느껴졌다. 할아버지가 했던 거의 모든 말을 다 까먹어버린 게 아쉬울 정도이다. 그래도 희미하게 생각나는 말을 기억해내본다.


"무엇이 당신을 그토록 많은 순례길에 오르게 했나요?"

"이 순례길은 신기하게도 사람을 하나로 모으는 힘이 있어. 같은 순례자라는 이유만으로 말이야. 네가 어디에서 왔건, 무엇을 하다 왔건 중요하지 않아. 이곳에서 우리는 모두 같은 형제야. 우리는 친한 친구에게도 하지 못하는 마음 깊은 이야기를 여기서 처음 보는 사람에게 털어놓을 때도 있잖아? 나는 여기서만 경험할 수 있는 이런 특별한 순간들이 좋아."


100KM도 안 남은 시점에서, 이 길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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