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일 차] 오 세브레이로 > 트리아카스텔라
[Day 25] O Cebreiro > Triacastela
오 세브레이로에 성당에서 미사를 보면 화살표가 새겨진 돌멩이를 받는다고 순례길 첫날 만났던 형이 얘기해 준 게 이제야 기억났다. 아쉽지만 뭐 시간을 돌릴 수는 없으니 무덤덤하게 침구류를 정리하고 알베르게를 나선다. 저 앞에서 담배를 태우시는 나의 아저씨를 발견한다. 인사를 드리니 한껏 미소를 지으며 팔을 크게 벌리고 이야기하신다.
"어제 새벽에 잠깐 깨서 밖에 나왔는데 진짜 별이 쏟아지더라. 너도 혹시 봤니?"
당연히 보지 못했다. 아쉽지만 역시 시간을 돌릴 수는 없으니 무덤덤하게 산을 내려간다. 아직 해가 뜨기 전이라 어둑어둑한 하늘인데 산길이라 자칫하다간 다칠 위험이 있어서 부산 친구가 헤드 랜턴을 끼고 앞장선다. 갑자기 빗방울이 하나둘 떨어지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버틸만했지만 점점 거세지는 빗줄기에 어쩔 수 없이 각자의 가방에서 우비를 꺼낸다.
무거운 가방을 메고 있는 상태로 한 번에 우비를 완벽히 입기 위해서는 꼭 누군가가 옆에 필요하다. 혼자서는 가방에 걸려 구석구석 손이 닿지 않기 때문이다. 이렇게 비가 올 때마다 나와 부산친구는 패트와 매트가 되어 서로를 챙겨준다. 나는 친구의 하늘색 우비를 정돈해 주고, 친구는 나의 주황색 우비를 정돈해 준다. 혼자서도 시간이 걸리지만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누군가가 옆에 있으면 무엇이든 더 쉽게 해결할 수 있는 법이다.
산티아고에 온 이래로 세 번째 우비를 입는 날이다. 왠지 모르겠지만 우비를 다 입고 모자를 머리에 쓰는 순간 세상에 나만 남겨진 듯한 느낌이 든다. 우비 위로 떨어지는 빗소리만 들릴뿐 사방은 고요하다. 핸드폰을 꺼낼 수도 없고, 쉽게 벤치에 앉아 쉴 수도 없으니, 얼마큼 왔는지도 얼마나 남았는지도 알 길이 없다. 빗 속에서 하염없이 흐르는 시간과 싸울 뿐이다.
그러던 중 어느 오두막을 발견한다. 밖에 잠시 우비를 벗어놓고 안으로 들어가니 허스키같이 생긴 대형견이 우리를 맞이한다. 몸을 녹이기 위해 따뜻한 핫초코와 또르띠야를 주문한다. 이렇게 비가 그칠 때까지 여기 머무르고 싶지만, 한눈에 보아도 쉽게 그칠 녀석이 아니다. 어느 정도의 휴식을 취하고 다시 나만의 우비 속 세상으로 들어간다.
그래도 오늘 목적지인 트리아카스텔라까지는 채 20km도 되지 않기에 12시가 되기 전 마을에 도착한다. 신기하게도 알베르게에 짐을 풀고 점심을 먹으러 나오니 비가 그쳐있다. 뭐 편하게 마을을 둘러보며 식당을 찾을 수 있으니 잘된 일이다. 스페인에 온 지 3주가 지났는데 처음으로 빠에야를 먹어본다. 약간 된장솥밥과 비슷한 느낌이었는데, 순식간에 음식을 해치웠다. 길을 걸으면서 자주 만나는 독일인 부부가 옆 테이블에 앉아 있었는데, 웃기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야, 나도 그거 시킬걸 그랬다."
알베르게의 1층에는 난로가 있고 그 위에 HOME SWEET HOME이라는 글자가 적혀있다. 최근 빅뱅 컴백곡의 제목과 똑같아서 묘하게 소름 돋았다. 그 옆에는 둥근 바테이블에 체스판이 놓여있었다. 나와 친구는 자연스레 의자에 앉아 판 위에 말을 놓기 시작했다. 중고등학교 때 이후로 근 15년 만인 듯하다. 우리는 해가 질 때까지 그 자리에 가만히 앉아 이기고 지는 게임을 반복했다. 어떻게 하면 상대방을 이길 수 있을까를 전략적으로 고민한 게 꽤나 오랜만에 있는 일이라 매 턴마다 설렘이 가득했다. 마지막까지 치열한 승부를 본 다음 방에 들어와 누워서 아까의 수많은 게임들을 복기해 본다.
어떤 게임이건 잘하고 싶은 욕망과 마음가짐이 그 게임을 더 잘하게 만드는 것 같다. 나는 중학교 1학년 때 체스 삼매경에 빠져있었는데, 돌이켜보면 그때 나는 체스로는 누구한테도 지기 싫어했다. 그래서 체스 관련 공략집 같은 것도 읽고, 주변에 잘하는 형들을 찾아가서 체스를 두자고 조르기도 했던 것 같다. 그 당시 내 또래 친구와 체스를 두면 거의 항상 이겼다. 그런데 나이가 들어가고 점차 흥미가 떨어지자 실력도 함께 떨어져서 현재는 그냥 평범한 체스 둘 줄 아는 일반인이 되어버렸다.
나는 가끔 인생이 게임 같다. 매일매일 평범하고 지루한 삶을 살아가면 경험치가 아주 조금씩 오르는데, 힘든 퀘스트를 완료하고 나면 한 번에 많은 경험치를 얻는다. 그렇게 큰 경험치가 쌓이다 보면 레벨업을 하기도 한다. 사실 레벨업을 하지 않아도 크게 상관은 없다. 어떤 게임이건 그냥 즐기는 유저가 있기 마련이다. 다만 이 인생이라는 게임을 잘하고 싶은 마음으로 계속해서 도전하다 보면, 어느새 나도 모르는 사이 꽤나 성장해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할 때가 있다. 가끔 이런 순간들에 나는 살아있음을 느끼곤 한다. 대부분 지루하기만 한 인생이 재밌어지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어떤 게임이건 즐기는 유저보다는 잘하는 유저가 되고 싶다. 나도 뿌듯하고 남들도 인정해 주는데 이왕 하는 거 잘하면 좋지 않은가. 인생이 게임이라면, 그리고 이 게임을 잘하고 싶다면, 삶을 대하는 태도가 중요한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