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일 차] 비야프랑카 델 비에르소 > 오세브레이로
[Day 24] Villafranca Del Bierozo > O Cebreiro
일요일의 아침이 밝아오기도 전에 알베르게를 떠난다. 성경에 나오는 신도 6일 동안 세상을 만들고 일요일은 쉬었다는데, 하필 오늘 피레네 산맥 이후로 가장 힘든 코스가 기다리고 있다. 그래도 오늘만 지나면 정확히 일주일 후 산티아고에 도착하게 된다. 즉, 오늘만 잘 마무리하면 이제 끝이 보인다는 뜻이다. 무엇이든지 간에 해보기 전까지는 무성한 소문에 지레 겁을 먹지만, 막상 해보면 별거 아님을 깨닫게 된다. 오늘 오세브레이로도 비슷하겠지 하며 애써 위안을 하지만 긴장되는 마음을 쉽게 진정시킬 수는 없다.
이쯤 되면 쓸데없는 산수를 하기 시작한다. 보통 산티아고 하루 코스는 25km 정도 되는데, 늦어도 아침 7시에는 출발해서 최소 오후 1시 정도에는 도착하니, 쉬는 시간과 밥 먹는 시간을 빼면 대략 1시간에 5km 정도 걷는 셈이다. 길에서 같이 걷는 사람과 이야기를 해도 처음 만난 게 아니라면, 아무리 길게 대화해 봤자 최대 2시간이다. 안타깝게도 이쯤 왔으면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것도 꽤 어려운 일이다. 바꿔 말하면 혼자 생각에 잠기는 시간이 하루에 최소 4시간은 주어진다는 뜻과 동일하다. 그렇다. 이제 더 이상 글로 옮길 내용이 남아있지 않다는 사실을 애써 둘러서 얘기한 것이다. 그래도 이 기행문이 용두사미로 남지 않기 위해 애써 최대한의 기록을 남겨본다.
오세브레이로에 본격적으로 오르기 전 마지막 마을에서 끼니를 해결한다. 베이컨과 오믈렛이 들어간 바게트를 시켰는데, 살면서 이렇게 질기고 딱딱한 빵은 처음 먹어본다. 이쯤 되면 식당 아주머니가 이 빵에 무슨 마법을 걸어놓은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하던 찰나, 옆 테이블에 앉아 있는 마을 주민같이 보이는 아저씨는 잘만 먹는다. 어찌 되었건 찜찜하게 배를 채운 상태로 남은 빵을 포장해 가방에 넣은 후 경사진 길을 오르기 시작한다.
오세브레이로까지 가는 길은 꽤나 가팔랐고, 중간중간 숨이 턱끝까지 차오르지만 꽤나 버틸만하다. 그간 너무 같은 풍경만 반복되는 평지를 걸어서인지, 오늘과 같은 경사가 괜히 반갑다. 어느 정도 산 중턱에 도달했을 때 주변을 둘러보니 주변에 가을의 색을 머금은 산봉우리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저 멀리 강한 빛줄기가 어둑어둑한 먹구름을 뚫고 산정상의 어딘가를 비추고 있다. "여기가 오세브레이로야. 빨리 와!"라고 누군가가 알려주는 듯하다.
그래도 여전히 올라가야 할 길이 꽤 남아있다. 내색하지는 않지만 나와 부산친구 사이에는 거친 숨소리만이 남아있다. 이렇게 힘들 때는 보통 어린 시절의 기억을 떠올리는 편이다. 순간 6학년 때 졸업 앨범에 사진 밑에 들어가는 좌우명이 생각난다. "포기란 배추셀 때나 하는 말이다." 꽤나 강렬했는지 그때 같은 반이었던 내 20년 지기 친구들은 여전히 내가 힘들다고 할 때 장난식으로 내 좌우명을 말하곤 한다. 그때 왜 이걸 적어서 제출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봐도 참 멋대가리 없다.
다만 한편으로는 포기라는 단어가 나라는 사람을 잘 표현하는 것 같기도 하다. 어려서부터 남들에게 지기 싫어했던 나는 그 어떤 순간에도 포기하는 법이 없었다. 무언가 한번 시작하면 끝을 보는 게 내 장점일만큼 나는 끈기가 강한 아이였다. 그러나 군대를 다녀와서 대학교에 복학한 이후로 무언가를 꾸준히 하는 게 어려워졌다. 사회가 정해준 공부라는 길을 따라가는 것은 너무나도 쉬웠지만, 앞으로 무엇을 하며 살아야 할지 스스로의 삶을 개척해 나가는 일은 자신이 없었다. 그것은 정답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이 뭐라도 해보려고 부단히 노력했던 것 같다. 하지만 명확한 목표가 없었기 때문에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에 늘 의구심이 뒤따랐다. 마음은 자꾸 조급해졌고, 이게 아니다 싶으면 다른 정답을 찾아 나서야 했기 때문에 자꾸만 포기하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산티아고까지 오게 되었다. 어떻게 보면 이번에도 하던 일을 포기하고 도피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여기는 그나마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가 명확하다. 매일 그저 걷다가 산티아고에 성당까지 가면 된다. 오늘도 결국 오세브레이로에 도착했고 해야 할 일을 잘 마무리했다. 그저 걷는 것일 뿐이지만 포기하지 않는 하루하루가 쌓여갈수록 점점 자신감이 생기는 것 같다. 마을의 어떤 상점에 들어갔는데 우연히 Ultreia가 써져 있는 반지를 발견한다. 디자인도 생각보다 괜찮고, 오늘 느낀 감정과 꽤 비슷한 듯하여 왼손 검지에 맞는 사이즈로 구매한다. 앞으로 이 반지를 볼 때마다 오늘을 기억하며, 포기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기를 바란다.
어제부터 계속 홀로서기라는 단어가 내 머릿속을 헤집어놓는다. 지금까지 나의 삶을 살아오지 못하고 주변의 말들에 휘둘렸기 때문에 중간에 포기하는 순간이 많이 찾아왔다. 어떤 외부의 압력에도 흔들리지 않는 나만의 중심을 찾는 것이 무엇보다 필요한 순간이 아닐까 싶다. 어려운 일이겠지만 지금이라도 나를 믿어야지 어쩔 수 있나. 이제 그만 방황하고 앞으로 나아가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