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일 차] 트리아카스텔라 > 사리아
[Day 26] Triacastela > Sarria
마을을 나오면 길이 두 갈래로 나뉜다. 왼쪽으로 가면 사모스(Samos)를 오른쪽으로 가면 산 실(San Xil)을 지나게 된다. 어느 길을 선택해도 오늘의 목적지인 사리아(Sarria)에 도착하는 것은 동일하다. 오 세브레이로를 지나 갈라시아 지방에 진입한 이제부터는 거의 평지라 난이도도 비슷하지만, 왼쪽 길을 선택하면 7km를 더 걷게 된다. 알베르게에서 나온 대부분의 순례자는 오른쪽 길을 선택하지만, 오늘은 왠지 조용하게 걷고 싶어 홀로 왼쪽 길을 택한다.
사모스를 지나는 길에는 나보다 앞서가는 순례자도, 나를 뒤따라오는 순례자도 보이지 않는다. 대신 유난히 화창한 햇살을 머금은 시냇물이 시원한 소리를 내며 동행을 자처한다. 덕분에 이쯤 되면 지루할 법한 이 순례길이 또 다른 아름다움을 띄고 있다. 이곳에 혼자만 덩그러니 남겨져 있자니 꽤 마음이 편안하다. 언제 내가 이러한 시간을 걸은 적이 있던가. 서울시가 잠이 든 시간에 차 하나 없는 잠수교가 어렴풋이 생각난다. 그것도 대학교 시절이니 5년도 더 지난 일이다. 예전에 친구와 부다페스트를 놀러 갔을 때, 아름다운 야경을 벗 삼아 홀로 성벽을 걷던 날도 생각난다. 고요함 속을 걸었던 경험이 내 기억 속에 꽤나 오래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나는 그 순간들을 좋아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누군가를 처음 만나서 대화를 나눌 때 보통 이름, 나이, 사는 곳, 직업, 취미를 묻곤 한다. (요즘엔 MBTI를 묻는 사람도 있지만 나는 그러지 않는다.) 그러면 적어도 나와의 대화를 원하는 상대방은 앞에 질문들을 똑같이 되묻는다. 그럴 때마다 항상 취미를 말하다가 머뭇거리게 된다. '내가 여가시간에 진정으로 즐기는 게 뭐지?'라고 생각해 보면 크게 생각나는 게 없기 때문이다. 축구, 테니스, 서핑, 스노보드, 다이빙, 수영, 러닝, 게임, 영화, 독서, 글쓰기, 노래, 악기 등 할 줄 아는 것도 꽤 많고, 즐기는 것도 꽤 많은데, 내가 미친 듯이 좋아해서 꾸준히 하는 게 딱히 없는 듯한 느낌이다. 그래서 어느 날 내 취미는 테니스가 되기도 하고, 또 다른 날은 글쓰기가 되기도 한다.
모든 게 설레기만 했던 대학교 1학년 시절, 모두가 처음 보는 동아리 모임에서 만난 한 친구가 문득 기억난다. 취미를 물었었는데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걷기라고 대답한 녀석이었다. 모두가 '얘 뭐지'라는 생각으로 고개를 갸우뚱하고 있을 때 그 친구가 한 말이 아직도 뚜렷하게 기억난다.
"저는 시간이 여유로우면 대중교통 안 타고 그냥 걸어 다녀요. 저번 주말에는 신촌에서 분당까지 걸어갔어요."
코드가 잘 맞는 친구여서 그 후로도 오랜 기간 간간히 연락하면서 지냈지만, 그때 당시에는 독특하거나 미쳤거나 둘 중 하나였다. 지금 지도를 켜보니 신촌역에서 서현역까지 대략 30km 정도 되는 듯하다. 그 순간을 떠올리는 지금 나는 10kg가 넘는 짐을 지고 같은 거리를 걷고 있다. 난 걔보다 더 미친놈이다.
10년이 지난 지금, 그 친구가 왜 걷기를 취미라고 대답했는지 알 것도 같다. 하늘과 땅을 번갈아 바라보기도 하고, 시시각각 변하는 주변을 살피기도 한다. 이렇게 세상과 모든 방면에서 상호작용을 하면서도, 동시에 모든 감각을 차단하여 사색에 잠길 수도 있다. 걷는 시간 동안 나는 내가 원하면 함께일 수도, 혼자일 수도 있다. 그 친구를 마지막으로 본 게 3년 전 즈음 같은데, 다시 만나게 된다면 같이 오랜 시간 걸어보고 싶다. 4학년 때 학교를 때려치우고, 하고 싶은 일을 찾아 떠난 멋진 친구인데 어디서든 잘 살고 있지 않을까 싶다.
사람이 많이 다니지 않아서 그런지 길 위에 풀이 많이 자라났다. 그 사이로 드물게 꽃이 한 송이씩 피어있고, 이 소중한 생명이 대를 이어나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는 벌의 모습도 보인다. 이렇게 땅만 쳐다보고 있다가 길을 잃기도 한다. 한 20분 정도 헤매었던 것 같다. 평소와 달리 오늘은 신기하게도 짜증이 안 난다. '돌아가는 길에 벌 한번 더 보지 뭐.' 확실히 미친 게 맞을 수도 있다.
어느새 사리아에 도착했다. 이곳은 잠시 휴가를 내고 순례 기를 일주일 코스로 오는 사람들이 시작하는 곳이라 갑자기 확 붐빌 수 있다고 들었는데, 다행히 알베르게에 나와 부산친구를 포함해 총 3명만이 묵는다. 하긴 나라도 겨울이 다되어가는 11월 말에 굳이 휴가를 써서 이곳으로 오진 않을 것 같다. 날씨가 좋을 때 오던가, 다른 곳을 가던가 하겠지.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건 사리아가 갈라시아 지방의 작은 도시이고, 갈라시아 지방은 뽈뽀가 유명하다는 사실이다. 찾아놓은 뽈뽀 음식점이 4시에 닫는다고 해서 허겁지겁 짐을 내려놓고 식당으로 향한다. 통에서 갓 삶아져 나온 문어의 다리를 먹기 좋은 크기로 숭덩숭덩 잘라서 그릇에 담고 그 위에 올리브유, 소금, 파프리카 가루를 대충 뿌려준다. '맘마미아.' 지난번에 숙소에서 만난 이탈리아 친구가 알려준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숙소에 돌아와서 오랜만에 응원하는 축구팀의 경기를 본다. 오랜만에 대승을 거두니 신난 채로 방 안에 들어간다. 그 모습을 보고 부산 친구가 묻는다.
"와이리 신났노."
"축구 5:1로 이겼다."
"여기까지 와서 축구 볼 정도면 엔간히 좋아하나 보네."
불과 몇 시간 전만 해도 내 취미는 걷기였는데 이제 좋아하는 팀 축구 경기 보기로 바뀌었다. 내일 아침이면 또다시 걷기로 바뀌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