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저 그런 삶을 살고 싶을 뿐

[28일 차] 포토마린 > 팔라스 데 레이

by Zorba

[Day 28] Portomarin > Palas de Rei


12월에 점점 가까워져서일까. 밤이 점점 길어지고 있는 듯하다. 내 기상 시간은 여전히 동일한데, 밤길을 한참 걸어야 서서히 떠오르는 해를 마주할 수 있다. 오늘도 역시 해드랜턴에 의존하며 하루를 시작한다. 하늘은 서서히 밝아지는 듯 하지만, 자욱한 안개 때문에 따뜻한 햇살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우중충한 오솔길을 따라 터벅터벅 걷는다.


이쯤 되니 기계적으로 걷는 듯한 느낌이다. 누군가와 이야기할 주제도, 홀로 생각할 주제도 모두 고갈된 채, 다음 장소로 이동하기 위한 발걸음만이 남아있다. 마치 전역을 바라보는 병장의 마음이랄까. 현재의 상황이 전역 100일 남은 시점부터 하루하루 달력의 숫자를 지워내던 지난날의 모습과 꽤 닮아있다. 끝은 보이기 시작하는데, 그 끝에 모든 신경을 몰두하다 보니 그곳으로 향하는 순간들이 고통스럽게 느껴진다. 시간은 괜히 느리게 흐르는 것 같고, 길은 괜히 평소보다 더 힘든 것 같다.


그래도 얼마 지나지 않아 안개 위로 강렬한 해가 떠오르며, 아직 희망이 있다고 조금만 힘내라며 따뜻하게 몸을 감싸준다. 금세 주황빛으로 물든 하늘과 푸른 들판을 둘러보며 언제 다시 만날지 모를 타지의 자연을 감상해 본다. 이제 이 길은 얼마 지나지 않으면 북적한 도시의 길로 바뀔 것이기에 지루함에 투덜대기보단 한가로움에 감사한 마음을 가지기로 한다.


길을 걸으며 오랜만에 아기 돼지를 보기도 하고, 어머니가 좋아하는 수국의 사진을 찍기도 한다. 문득 내가 산티아고에 걷는 내내 '한국에 돌아가면 무엇을 해야지'라는 생각에만 사로잡혀 있었던 게 아닌가 싶다. 휴직을 했으니 그 시간을 '생산적'으로 사용해야 하는 게 당연하니, 생각의 흐름이 거기에만 고정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 보니 자꾸 내가 할 수 있는 것, 해왔던 것에만 집중하였고, 다른 유연한 생각들이 비집고 들어올 틈을 허락하지 않았다.


돌이켜 보면 나의 삶은 그저 그냥 흐르는 대로 살아왔는데, 왜 나는 이 소중한 30일 시간의 대부분을 앞날을 걱정하는 쓸데없는 고민을 하는 데 사용했을까 자책하게 된다. 조급할수록 일을 그르친다는 것을 알면서도 나는 남들과 다른 선택을 했다는 이유만으로 그것을 정당화하기 위해 누구보다 조바심 냈는지도 모르겠다. 산티아고를 걸으면서 한국에 가면 해야 할 일들을 산더미처럼 쌓아놨다. 사실 지킬 수 있을지조차 모르겠다. 그냥 예전처럼, 평소 했던 것처럼, 하루하루 최선을 다하면 될 것 같은데 그게 점점 어려워진다. 생각이 많아지면서 기대감보다 두려움이 커지는 요즘이다. 시간이 주는 압박감일까. 다른 사람과 비교에서 오는 허탈함일까.


산티아고에 오기 전, 좋아하는 작가인 서머싯 몸의 '면도날'이라는 책을 읽었다. 요즘 들어 책에 도통 집중이 안되었는데, 오랜만에 푹 빠져서 읽은 소설이었다. 남들이 선망하는 직업을 포기하고 그냥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진리를 찾겠다는 주인공의 모습이 그렇게 와닿았던 건, 나는 그럴 용기가 없지만 나도 그런 삶을 살고 싶었던 게 아니었을까. 내가 그리스인 조르바라는 소설을 몇 번이나 읽었던 것도. 역시나 같은 이유에서가 아닐까.


난 여전히 조르바처럼 해변에서 악기를 연주하며 춤을 출수도, 래리처럼 약혼녀와 파혼을 하고 인도로 떠날 수도 없다. 그래도 마음 한편에 그런 삶을 사는 사람들을 품은 채 살아갈 수는 있다. 나라는 사람이 변하지는 못할지라도, 적어도 내가 사는 환경은 바꿔볼 수 있지 않을까.


어쩌면 나는 지금과는 다른 삶을 살고 싶을 뿐인 것일지도 모르겠다. 다만 그런 선택을 어렵게 만드는 소음이 많은 듯하다. 이번 산티아고를 다시 생각해보려 한다. 이 길은 그런 소음으로부터 잠시 나를 가둬두는 여행이다.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이 시점, 예상치 못한 사고의 흐름 속에서 답을 찾아가고 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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