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자의 길이 있다는 것

[30일 차] 아르주아 > 오페드로우조

by Zorba

[Day 30] Arzua > O Pedrouzo


이제 내일이면 산티아고에 도착한다. 하루도 쉬지 않고 꾸준히 걸었다. 한 번도 해보다 늦게 하루를 시작하지 않았다. 한 달여의 시간 동안 무언가를 끈기 있게 규칙적으로 해낸 게 언제였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성인이 된 이후로 처음 있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해낼 수 없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다만 해낼 날이 어느새 이렇게 찾아올지도 몰랐다.


나에게 순례길이란 무엇이었을까? 사실 프롤로그에서도 적어내렸지만, 이번 연도에는 특히 많은 좌절과 실패가 있었다. 가끔 안 좋은 일들이 겹겹이 일어나다 보면 우울감과 패배감이 어느새 마음 한편에 자리하게 되고, 자연스레 나를 지탱하고 있던 자존감이 무너지는 것을 경험하곤 했다. 이 모든 부정적인 감정들이 나를 이 길 위로 떠밀었다. 잠시 내가 살던 곳에서 벗어나 전혀 다른 환경에서 걷기를 반복하다 보면, 어느새 나를 집어삼키던 것들을 서서히 정화시킬 수 있으리라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나는 그간의 모든 실패를 조금이나마 잊을 수 있는, 순례길 완주라는 작지만 소중한 한 번의 성공에 가까이 왔다. 축구 경기에서는 공격수가 90분 내내 최악의 경기력을 선보여도 마지막에 골만 넣으면 모든 관중들이 그의 이름을 환호하면서 지난 실수들을 까마득히 잊어버린다. 그렇다. 순례길은 나라는 공격수에게 단비 같은 극장골이었다. 비록 조기축구회의 흔하디 흔한 경기 중 하나였음에도 말이다.


순례길 내내 부산 친구와 나는 각자 맡은 역할이 있었다. 나는 순례길 내 일어나는 모든 대화를 전담하는 소통부장이었고, 부산 친구는 모든 조건을 검토하여 최상의 알베르게를 찾아내는 알부장이었다. 내일부터는 각자 다른 곳으로 흩어질 예정이었기에, 사실상 오늘 오페드로우조가 함께 묵는 마지막 알베르게였다. 우리는 그렇게 체크인을 하고, 그동안 맡은 바를 충실히 한 서로에게 감사를 표했다.


저녁을 먹고 잠시 알베르게에서 쉬다가 밖으로 나온다. 벤치에 앉아 깜깜한 하늘을 바라보며, 결국 끊지 못한 담배를 연달아 피운다. 몇 분이 채 지나지도 않아 내가 좋아하는 프랑스 할아버지 미셸이 옆으로와 조용히 불을 붙이고 나에게 미소를 짓는다. 그리고 그에게 오늘 내내 나를 괴롭혔던 고민을 털어놓는다.


"미셸, 묵시아랑 피스테라를 가봤어요?"

"그럼. 여러 번 가봤지."

"지금 고민 중인 게 있어요. 내일 산티아고에서 자고 다음날 묵시아와 피스테라를 같이 투어로 짧게 둘러보고 포르투로 이동하는 게 나을까요? 아니면 내일 산티아고 도착 후 묵시아로 이동해서 거기서 하룻밤 자고, 다음날 여유롭게 마을을 둘러보다가 피스테라로 이동해서 일몰을 보고 그다음 날 포르투로 이동하는 게 나을까요? 당신이 보기에 묵시아가 그렇게 오래 있을만한 가치가 있나요?"


"개인적으로 나는 묵시아 마을을 정말 좋아해. 조용하고 한적한 어촌인데 거기에 있으면 마음이 평화로워지는 기분을 들어. 이거는 묵시아에서만 느낄 수 있는 특별한 감정이야. 다만 나는 감히 너한테 묵시아를 가보라고 추천할 수는 없어. 왜냐면 이 길은 '너의 길'이지 '나의 길'이 아니기 때문이야. 이 산티아고는 하나의 목적지로 향하는 같은 길이지만, 각자가 걷는 길이 모두 다 달라. 남의 길을 대신해서 걷지 말고 너의 길을 걸어. 묵시아에 하룻밤을 묵을지 말지는 온전한 너의 선택이야."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내가 산티아고에서 그토록 갈구하던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지?'에 대한 답을 찾게 된 순간이었다. 산티아고 도착이 24시간도 채 남지 않은 어둑한 밤, 가로등이 비치는 벤치에서 나누던 어느 현인과의 대화. 순례길을 시작한 이래로 가장 강렬한 순간이었다. 아마 시간이 지나도 평생 잊지 못할 기억으로 남게 될 것 같다. 그의 말 하나하나가 고스란히 마음 깊숙이 박혔다. '각자의 길이 있다는 것.' 이번 여행을 관통하는 메시지였다.


나도 모르게 눈시울이 붉어지며 미셸을 두 팔 벌려 안는다. 그가 내 등을 토닥여준다. 평소에 그 누구와도 셀카를 찍지 않는 내가 휴대폰을 꺼내 그와의 사진을 요청한다. 우리는 그렇게 알베르게에 들어가 각자의 침대로 향한다. 만약 내가 프랑스어를 잘해서 미셸의 말을 그 나라 본연의 언어로 들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을 정도로 그의 단어 하나하나가 나에게는 감동이었다.


침대에 누워 잠을 청하기 전, 그동안 산티아고에서 만났던 사람들을 떠올려본다. 그리고 그들과의 추억을 그려본다.


산티아고 시작길을 알렸던 출판사 형. 모든 와인은 아름답다던 이탈리아 친구 파브리오. 첫날 지친 우리를 구원해 주었던 바스크 아저씨 필리오. 무리해서 걷다가 도착한 캠핑장에서 맥주를 건네던 네 분의 스페인 아주머니. 팜플로나에서 만나 순례길 도착하는 날까지 동반자가 되어주었던 부산 친구와 대구 동생. 프랑스 여자와 결혼해 귀여운 아기가 있는 대구 형님. 강아지와 함께 걷는 슬로베니아 석공 에릭. 차분한 목소리로 이야기하던 호주 아저씨 그레이. 순례길도 여행이라며 고통에 살지 말고 즐기라는 말을 해주신 산티아고 7회 차 태백 아저씨. 볼 때마다 손을 잡고 걸어가던 스페인 부부. 만날 때마다 호탕한 웃음을 짓던 태권도를 좋아하는 브라질 아저씨 호세. 늦은 밤 군대 얘기를 나누었던 캐나다 군인 빅터. 자전거를 타지만 가끔은 나와 대화하기 위해 내려서 함께 걸어주었던 트레스틴. 파일럿이 되고 싶은 아르헨티나 출신의 덴마크 목수 이냐시오. 미소가 인상적이었던 일본 아주머니. 한국 절에서 2년간 지냈던 이스라엘 아주머니. 부르고스에서 작별인사를 건넨 프랑스 아주머니. 매번 담배를 건네주시던 나의 아저씨. 축구를 좋아하는 영국 아저씨 데이빗. 아일랜드 목장의 아들 벤. 간호사를 그만두고 다이버가 된 양평 동생. 짜파게티를 끓여주었던 서울 형님. 기타를 메고 다니던 자연을 좋아하는 캐나다 소녀 샤티라. 은퇴한 독일 의사 아저씨. 베네치아에서 가이드를 하시는 한국인 신혼부부. 서점을 차리고 싶다는 프랑스 친구. 즉석 인화 사진을 찍어주던 스코틀랜드 청년 케빈. IT 업계에서 일하는 바르셀로나 아저씨 루이스. 은퇴한 경찰, 군인, 소방관, 그리고 초록색 오스프리 가방을 멘 어떤 아저씨로 구성된 스페인 어벤저스 4인방. 가끔 담배 피울 때 인사를 나누곤 했던 독일인 커플. 베이킹을 좋아하는 키 큰 프랑스 소녀 호셀라. 코골이로 중간중간 빌런을 자처했던 국적 불분명의 아저씨 마이클. 체스를 두자던 벨기에 친구 토마스. 그리고 길에서 중간중간 스쳐 지나갔던 사람들. 텐트에서 자곤 했던 사람들. 알베르게에서 만난 사람들.


내일 산티아고에서 이들 중 몇명을 만날 수 있을까. 모두가 그리워지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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