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일 차] 오페드로우조 >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 묵시아
[Day 31] O Pedrouzo > Santiago de Compostela > Muxia
평소보다 이른 새벽 5시에 일어나 재빠르게 짐을 챙기고 알베르게를 나선다. 모순적이게도 순례길을 걸으며 무신론자가 된 나지만,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 이왕이면 미사는 드리고자 한다. 미사가 12시에 시작하고, 산티아고까지는 대략 20km 남짓 남았으니 여유롭게 걸으면 충분히 시간내에 도착할 수 있을 것 같다. 다만 비라는 변수는 생각지 못했다.
하필이면 산티아고에 도착하는 당일 날 지금껏 본적 없는 양의 비가 쏟아진다. 이 마지막 날을 하늘이 축복하는 듯하다. 흘러넘치는 축복에 주체할 수 없었던 신발은 스스로를 흠뻑 젖히고 만다. 이미 어두컴컴한 새벽이라 앞도 잘 안 보이는데 하필이면 하나 남은 해드렌턴까지 방전되었다. 어쩔 수 없이 희미한 휴대폰 라이트에 의존하면서 걷지만, 곳곳에 고인 물웅덩이를 피할 수는 없다.
매일 같이 길을 안내해 주었던 노란색 화살표도 잘 안 보이고, 쏟아지는 비에 휴대폰 터치도 잘 안 먹는 상황이라 여러 번 길을 잘못 들게 된다. 중간에 하늘을 향해 소리를 질러보지만, 이 비는 그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왜 하필 마지막날 이런 시련이 찾아오는지는 모르겠다. 최대한 긍정적으로 사고해 본다.
"산티아고 성당에 딱 도착하면 기적적으로 비가 그치려나보다. 우리 마지막을 좀 더 극적으로 만드려고. 그렇지?"
"제발 그랬으면 좋겠다."
2시간쯤 쉬지 않고 걸었을까. 저 앞에 나무정자같이 생긴 쉼터가 보인다. 아마 우리가 오늘 쉴 수 있는 처음이자 마지막 공간인 듯하다. 배낭에 남아있는 모든 간식을 털어 넣고, 마지막 남은 담배까지 태운다. 조금 시간이 지나니 빗줄기가 조금씩 약해지고 어둠이 걷히기 시작한다. 우리는 다시 힘겹게 발걸음을 옮긴다.
언덕을 하나 넘으니 저 멀리 산티아고가 보인다. 분명 이 길에는 나와 부산 친구 둘만 있었는데, 도시에 가까워지자 어디선가 하나둘 순례자가 모여들기 시작한다. 그렇게 우리는 큰 무리를 이루어 모두 같이 산티아고 대성당으로 향하게 된다. 그중에는 기타를 여전히 지고 다니는 샤티라도 있었다. 열흘 만에 다시 만난 우리는 포옹으로 인사를 나누고, 마지막 길을 함께한다. 그녀가 묻는다.
"순례길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순간이 언제였어?"
"어제 저녁. 이 길 내내 나 자신에게 물었던 질문의 정답을 찾았거든."
"정말 잘됐다. 그래도 산티아고가 끝나기 전에 찾아서 다행이야."
"기타는 언제 쳐줄 거야? 나 아직 한 번도 못 들은거 알지?"
"곧! 이제 다 왔는걸."
샤키라의 옆에는 처음 보는 네덜란드 남자애가 있었다. 세일즈를 했던 요아킴이라는 친구였는데, 나와 비슷한 나이에 나와 같은 고민을 안고 길을 나선 것으로 보인다. 우리는 많은 공통점이 있었는데, 이제야 만난 게 아쉬울 따름이었다. 그렇게 무리에 섞여 서로 다른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던 중, 어디선가 악기소리가 들린다. 클라리넷과 바순 그 어딘가의 음역대를 가진 구슬픈 선율의 행진곡 같다. 고개를 돌려 그곳을 바라보니 아치형의 통로가 보인다. 누가봐도 저기만 지나면 드디어 도착이다.
기적적으로 비가 그치기 시작한다. 하늘은 여전히 흐리지만 잠시나마 우리의 도착을 축복해 주고자 비를 멈춰내는 듯하다. 대신 무리 내 몇몇 순례자들이 흘리는 눈물이 그 비를 대신한다. 나 역시 붉어지는 눈시울을 훔치며 점점 커지는 악기 소리 사이로 통로를 지나간다. 그 찰나 누군가 내 어깨를 치고 지나간다. 놀라서 뒤를 돌아보니 큰 강아지가 보인다. 3주 전 로그로뇨에서 작별인사를 건넸던, 다시는 못 볼 것만 같았던 석공 에릭이다. 그는 내 귓가에 마지막 한마디를 건넨 뒤 반대편으로 서서히 사라진다.
"오늘을 온전히 즐겨. 너는 충분히 그럴 자격이 있어."
에릭과 강아지를 시야에서 보낸 후 다시 앞을 바라보니, 통로는 이미 지나있다. 넓은 광장에 모든 순례자들이 서로를 껴안으며 고생했다고 토닥여준다. 나는 그 자리에 멍하니 서서 산티아고 대성당을 바라보며 흐르는 눈물을 닦아낸다. 저 멀리 대구 동생이 손을 흔들며 천천히 다가온다. 샤티라는 이내 기타를 꺼내 연주하며 노래를 부른다. 프랑스 할아버지 미셸은 본인이 직접 조각한 나무 지팡이를 내려놓는다. 나는 배낭을 내려놓고 우비를 벗어던지며 그 자리에 주저앉는다. 이제야 실감이 난다.
나는 드디어 산티아고에 도착했다.
광장에서 지금까지 길에서 만나왔던 순례자들과 다시 한번 인사를 나누고 성당 안으로 들어간다. 순례길에 오른 이후 거의 처음으로 미사를 드린다. 스페인어를 알아듣지는 못하지만, 미사 전례라는 게 결국 다 똑같기 때문에 대충 어느 부분을 얘기하고 있겠거니 짐작해 본다. 영성체 후 묵상시간에 고개를 떨구고 내가 이 길에서 무엇을 찾았는지 스스로에게 질문한다. 왜인지 모르겠는데 문득 사랑이라는 단어가 생각난다. 나는 31일간 이곳에서 사랑을 주고받았는지도 모르겠다.
미사가 끝나니 비가 아까보다 더 많이 온다. 우비를 다시 들쳐 입고 근처 식당으로 향한다. 부산 친구와 그토록 먹고 싶었던 한식집에서 산티아고 최후의 만찬을 함께한다. 근처 상점에서 기념품도 몇 개 사본다. 주변에서 반가운 얼굴을 만날 때마다 휴대폰을 꺼내 사진을 찍는다. 모두 꼴이 말이 아니지만, 그렇기에 우리의 미소가 더욱 밝아 보인다. 이제 정말 마지막일지도 모를 작별인사를 건넨다. 그동안 함께 해줘서 고맙다고, 고생했다고, 축하한다고, 너의 앞으로의 길을 응원한다고.
나와 대구 동생은 오늘 묵시아로 향한다. 거기서 하룻밤을 자고 내일 피스테라에서 일몰을 보며 이 길을 마무리하려는 계획이다. 버스를 타고 저녁 즈음 묵시아에 도착한다. 오랜만에 멀미가 났던지라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근처 하수구에 속을 게워낸다. 동시에 지금까지 축적되었던 모든 피로도 함께 날려버린 듯하다. 후련하고 상쾌하다.
미리 예약해 둔 알베르게에 들어간다. 주인아주머니가 따뜻하게 맞이해 준다. 우리는 하루 종일 젖어있던 몸을 씻어내고, 젖어있던 옷을 빨아서 널어두고, 젖어있던 신발에 신문지를 끼워 넣는다. 길고 길었던 하루의 마침표를 드디어 찍는다.
늦은 밤, 이 작은 어촌 마을의 어귀에 앉아 지난 1년을 되돌아본다. 무기력증에 갇혀 살던 지난 스물아홉이었다. 이십 대의 끝자락에서 충동적으로 떠나온 이 길은 나에게 열심히 살고 싶은 욕심을 심어주었다. 그것만으로 충분하다. 이제는 적어도 앞으로의 나날들을 기대할 수 있게 되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