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일 차] 묵시아 > 피스테라
[Day 32] Muxia > Fisterra
날이 밝기 전 알베르게를 나와 묵시아 해변으로 이동한다. 인기척이 없는 길을 따라 올라가니 큰 비석과 0.00km라고 적혀있는 표시석을 마주하게 된다. 등 뒤로 떠오르는 해도 오늘이 마지막일 듯싶다. 서서히 밝아지는 하늘에 숨어있던 등대도 조심스레 모습을 드러낸다. 여전히 꿋꿋이 본인의 일을 해내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빛을 잃지 않기를 바라본다.
오늘따라 햇빛이 강렬하다. 보통 순례길에서 이와 같은 날 뒤를 돌아보면, 얼굴이 저절로 찌푸려진다. 뒤이어 고개를 자연스레 돌리고 앞에 놓인 길을 따라 걸어가게 된다. 하지만 오늘은 더 이상 나아가야 할 길이 없다. 이곳은 유라시아 대륙의 서쪽 끝에 있는 작은 어촌 마을이다. 처음으로 해를 마주하며 마을로 되돌아간다. 마치 산티아고 여행이 끝나고 나서야 나의 과거를 온전히 마주할 용기가 생긴 것처럼 말이다.
묵시아는 마을을 한 바퀴 둘러보는데 넉넉잡아 두 시간도 채 안 걸릴 정도로 작은 마을이다. 현재 활동하고 있는 모든 마을 사람들이 모여있는 듯한 카페에서 브런치를 여유롭게 먹고 작은 낚싯배들이 정박해 있는 포구를 따라 한 바퀴 빙 둘러 걷는다. 새벽에 이미 할 일을 마치고 온 것일까. 모든 배가 자리를 굳건히 지키며 휴식을 취하고 있다. 한적하고 조용하다. 마을 끝자락에 위치한 해변가에 가니 그래도 파도치는 소리라도 조금씩 들리는 정도이다. 괜히 신발을 벗고 발을 내밀어 밀려오는 바닷물의 수온을 확인해 본다. 그러다 모래사장 위에 새겨진 나의 그림자에 정신을 빼앗긴다.
옆에 있는 대구 동생이 순례길을 걷던 어느 평범한 날 문득 나에게 했던 질문이 생각난다.
"형님은 먼 미래에 혹시나 계획했던 모든 것을 다 이뤘을 때, 그다음엔 무엇을 하고 싶으세요?"
"조용한 어촌 마을에 가서 그림 같은 집을 짓고 책 쓰면서 여유롭게 살고 싶어."
그 마을을 찾는 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린 것 같진 않다.
"여기라면 행복할 것 같아. 맘에 드네 묵시아. 나이 들고 또 오고 싶다."
내가 꿈에 그리던 마을의 풍경을 묵시아는 담고 있었다. 흙이 단단한 모래사장. 잔잔한 파도. 같이 부둣가를 산책하는 노부부. 즐겁게 뛰어노는 아이들. 마을 주민들이 모두 모이는 카페와 음식점. 무엇보다 바다. 예전에 국내 여행을 다닐 때 목포에 2주 정도 머물렀었는데, 그때 느꼈던 감정의 일부를 묵시아도 주고 있는 듯하다. 그 규모는 다르겠지만, 어쨌거나 배가 정박하는 장소가 주는 오묘한 매력이랄까.
피스테라로 가는 버스를 기다리는 중에 어떤 미국인 아저씨를 만난다. 어쩌다 순례길을 오게 되었는지 물어보았다.
"자본주의의 끝인 미국이라는 나라 안에서 한평생 돈을 좇으며 살았어. 그러다 보니 많은 것을 놓친 것 같아. 이렇게는 안 되겠다 싶어서 아무 생각 없이 유럽으로 와서 이곳저곳을 여행 중이야." 역시나 이곳에 온 사람들은 대부분이 같은 마음이다.
한두 시간 정도 버스를 타니 피스테라에 도착한다. 장을 봐서 간단하게 파스타를 해먹은 다음, 우리의 마지막 목적지인 세상의 끝, 피니스테라를 향해 걸어간다. 마을에서 대략 한 시간 정도의 거리인데 아마 산티아고 순례길 마지막 걸음이 될 것이다. '마지막'이라는 이름의 걸맞게 저 멀리서 낯익은 얼굴의 순례자가 걸어온다. 알고 보니 나와 대구 동생이 팜플로나에서 처음 만났던 홍콩 아저씨다. 대략 3주 만이다. 앞으로 평생 못 볼 줄 알았던 얼굴을 보니 이렇게나마 반가울 수가 없다.
헤어지기 전에 아저씨가 한 말씀해 주신다.
"항상 건강하게 살아야 해. 그게 가장 중요해. 그리고 하나 더. 세상은 여전히 아름다워."
그 순간 느꼈던 감정을 오롯이 부여잡고 걷다 보니 어느새 또 다른 0.00Km의 표시석을 마주하게 된다. 저 앞에는 이미 절벽 위 겹겹이 쌓인 돌 위에 사람들이 앉아 일몰을 기다리고 있다. 나도 그중에 하나가 되기로 한다. 해가 서서히 수평선 위로 내려가는 모습을 지켜본다. 살아생전 시간의 흐름을 이보다 직접적으로 느낀 순간은 없을 듯하다.
내가 처음 본 해는 바다 위로 길게 늘어져 있는 구름 위에 있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해가 구름 뒤로 숨는다. 세상이 붉게 변한다. 얼마나 지났을까. 해가 구름 밑으로 떨어져서 수평선 아래로 자취를 감춘다. 세상이 검게 변한다.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일몰이었다. 이 시간을 채우던 짧은 순간순간을 오랜 시간이 지나도 생생히 기억할 것만 같다. 한 달여간의 순례길을 마무리하기에 더할 나위 없이 완벽했다.
15세기 이전의 유럽사람들은 이곳을 세상의 끝이라고 믿어왔다. 모두가 그저 이곳에 앉아 먼바다를 바라만 보고 있을 때, 콜럼버스는 이 세상의 끝을 넘어 또 다른 세상을 발견했다. 나도 이제 그만 일어나서 이곳을 떠나보려 한다. 전부라고 믿어왔던 지금의 삶을 넘어 또 다른 삶을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Buen Camino. Muchas Gratia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