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일 없는 하루

[23일 차] 폰페라다 > 비야프랑카 델 비에르소

by Zorba

[Day 23] Ponferrada > Villafranca Del Bierzo


폰페라다를 벗어나는 길은 꽤나 지루하다. 차가 지나가는 큰 도로 옆으로 적막한 길을 2시간가량 걷게 된다. 화려한 건물이나 겨울을 준비하는 나무 대신, 컨테이너가 듬성듬성 위치해 있다. 서울과 조금은 떨어진 경기도 외곽에서 자주 보이는 형태이다. 이런 곳에는 모름지기 대형마트가 있어야 하는데 하며 두리번거리던 찰나, 저 멀리 디아(Dia)가 보인다. 나와 부산 친구는 자연스레 뺑오쇼콜라를 하나씩 집는다. 디아에 도착하면 꼭 해야 하는 통과의례 같은 것이다. 또 내일이면 앞으로 남은 날들 중 가장 힘든 코스가 기다리고 있으니 무리를 해서라도 초콜릿과 젤리를 쟁여놓기로 한다.


"너 길리안이라는 초콜릿 알아?"

"아니. 근데 뭔데 이리 비싼데?"

"나 믿고 이거 하나만 사자. 내일 나한테 고마워할 거다."

"알겠다 인마"


그렇게 친구를 설득해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사악한 가격의 초콜릿을 샀다. (물론 n분의 1이 아니었다면 거들떠도 안 봤을 녀석이었다.) 약간의 배를 채우고 다시 또 지루한 길을 걷는데, 역시나 왼쪽 어깨가 아파오기 시작했다. 아주 편안한 자세로 걷고 있는 부산 친구를 보니, 이게 가방의 문제인지 의심이 갔다. 친구가 흔쾌히 허락해서 한 시간가량 가방을 바꿔 들어봤다. 안타깝게도 어깨가 아픈 건 매한가지였다. 그렇게 나는 더 이상 가방에 아무런 불평도 하지 않은 채로 묵묵히 갈 길을 걸어갈 수 있었다. 산티아고를 건 지 3주가 지나고 나서야 인정하게 된 불편한 진실이었다.


어제 빅뱅의 기습적인 컴백이 학창 시절의 향수를 꽤나 자극했던지라, 나와 부산 친구는 가는 길 내내 빅뱅 노래를 흥얼거렸다. 예전에 무한도전에서 토토가를 할 때 HOT나 젝스키스 팬들이 왜 우는지 잘 몰랐는데, 이제는 그 마음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빅뱅의 노래를 들으며 중고등학생 시절을 그리워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마침내 다시 돌아온 그들을 보며, 비로소 나의 어린 시절을 온전히 추억할 수 있게 되었다. TV에 나온 그들의 눈물 역시 지나가버린 청춘에 대한 반가움일지도 모르겠다.


나무는 간신이 붙어있던 마지막 잎새까지도 떨어뜨리고 벌거벗은 몸으로 겨울나기를 준비한다. 나는 조금 더 가까운 미래를 준비하기로 한다. 내일은 오세브레이로(O Cebreiro)라는 곳에 가야 하는데, 프랑스길에서 첫날 피레네 산맥 다음으로 가장 힘든 코스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 오늘은 내일을 위한 만반의 준비를 해둬야 한다. 부산 친구가 기가 막힌 알베르게를 찾았다고 해서 들어갔는데, 지금까지 묵었던 숙소 중에서 퀄리티가 최상이었다. Vina Femita라는 곳이었는데, 건물 자체가 최신식이었고 방이 1층 침대로만 채워져 있었다. 심지어 나를 포함해 4명밖에 이곳에 묵지 않아서 랜덤 한 순례자의 코골이 공격 확률도 현저히 줄어들었다.


숙소의 짐을 풀고 부산 친구와 마을을 구경해 본다. 알고 보니 '스페인 하숙'이라는 TV 프로그램에 나온 알베르게도 이 마을에 있다고 한다. 나는 처음 들어봤는데, 방영되었을 때 한국에서 꽤나 인기가 있었다고 한다. 그것 때문에 산티아고 순례길이 한국에서 유명해진 게 아니냐고 외국인 친구가 물었는데, 나는 "정말로?"라고 반문했다. 그 녀석은 내가 한국인이 맞나 의심했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더 많은 사람에게 이 좋은 순례길을 알려준 좋은 프로그램이니 감사의 의미로 사진이라도 한 컷 남기고 다시 마을을 둘러본다. 한국인 라면을 파는 곳이 있다. 이틀 전 폰세바돈에서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라면 6개를 산다. 이 정도면 부족함 없이 충분히 먹을 수 있을 것이다.


잠들기 전 아무 일 없었던 평범한 하루를 회고해 본다. 사실 이러한 날은 생각할 거리도 없다. 문득 이 산티아고에서 무엇을 깨달았는지 고민하게 된다. 사람은 생각보다 쉽게 달라지지 않는다는 것? 사실 한국으로 돌아가도 내가 바뀔 것이란 생각이 전혀 들지 않는다. 다만 이제부터 홀로서기의 시간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은 확실하다. 산티아고는 누군가에게 의지하지 않는 법을 배우는 첫걸음이라 생각한다. 앞으로의 나날들이 두려우면서도 기대된다. 아까 잠시 벤치에 앉아 쉴 때 누군가가 옆에 나무에다가 써놓은 글씨가 꽤나 인상 깊다.


"You are how you choose to 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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