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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하루키는 음악광으로 유명하다. 작품에 빠지지 않고 비틀즈와 재즈 음악이 흐른다. 하루키 작품을 읽고 재즈를 듣게 되었다는 사람도 적지 않다. 그런 점에서 하루키는 재즈 문화 전파에 지대한 기여를 했다고 볼 수 있다. 하루키의 플레이리스트. 하루키 책에서 나온 음악을 선정해 만든 음반. 직접 재즈 카페 '피터캣'을 운영했을 정도로 음악에 진심인 사람이다. 26살에 결혼하고 차린 가게니, 아내도 진심이었지 않았을까 싶다. 졸업도 하지 않고, 일을 벌이는 남자친구와 결혼하기로 결심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으니.
내 생각엔, 지금의 하루키만큼이나 그 시기에 하루키의 아내는 대단한 존재라고 생각한다.
갑자기 왜 이 얘기가 나왔을까 생각해 보니, 나는 재즈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글을 쓰는 행위도 일종의 즉흥 연주이다. 원래 일반적인 글쓰기라면 위에 있는 두, 세 문장은 날려버리고 새로 글을 다듬었겠지만 그게 그리 중요해 보이지는 않는다.
중요한 것은 한국 사람들이 재즈를 알게 되는 통로로 하루키가 사용되는 것은 긍정적이다.
하루키가 재즈에 대해 쓴 책 중에 '의미가 없다면 스윙은 없다'가 있다. 처음에는 Duke Ellington의 'It Don't Mean a Thing (If it Ain't Got that Swing)'에서 따온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렇게 본다면 '스윙이 없다면 아무 의미가 없다.'가 되어야 한다.(영어를 못하니 여기서 번역된 것은 모두 번역기에 기초한다.) 설마 오역인가? 설마 책 제목을 잘못 번역하려고.라고 생각해 일본어 원제를 보니 '意味がなければスイングはない'라고 되어 있었다. 번역기에 따르면 '의미가 없다면 스윙은 없다'가 옳은 번역이다.
그렇다면 하루키가 원곡 제목을 잘못 읽은 것일까? 위대한 개츠비도 번역했는데, 설마 그걸 잘못 읽은 것은 아닐 테다. 그렇다면 분명 의도를 담아 비튼 것이겠다.
하루키의 작명에 의하면 의미가 스윙보다 선재하는 것이고, Duke Elington의 작명에 의하면 스윙이 의미보다 선재하는 것이다. 이 정도면 스윙은 재즈 팬들에게 이데아에 가깝다. 스윙은 존재의 본질이고, 정신의 원형이다. 그렇기에 재즈에서 스윙은 결코 만만한 개념이 아니다. 사실 재즈 자체가 스윙이라고도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스윙이 없다면 재즈가 아닌 것이다.
이쯤 되면 늘 그렇듯 진짜 가짜 논쟁이 나온다. 진짜 가짜 논쟁은 록에서도 있었고, 요들송에도 있었고, 판소리에도 있었고, 힙합에서도 있었고, 거문고 산조에도 있었다.
재즈에선 Pat Metheny가 Kenny G를 세상에서 제일 멍청한 음악을 한다고 비난했고, Keith Jarrett은 전통 스탠다즈에서 벗어나고 있는 젊은 피아니스트들 못 마땅해했다.
그렇다면 2023년 기준으로 가장 핫한 재즈 계의 진짜 가짜 논쟁의 주인공은 누굴까.
전지구적으로 유명한 Laufey이다.
전지구적으로 유명하다고 썼지만 사실 이 글을 쓰기 전까지 Laufey를 몰랐다. 다행히 Laufey가 진짜 재즈를 하고 있는가에 대해서는 친절하게도 Adam Neely가 분석한 바가 있다.
Adam Neely에 의하면, 결론적으로 Laufey가 하는 음악은 재즈가 아니다. 이유는 글의 흐름상 모두가 예측할 수 있듯이 '스윙'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실제로 스윙감이 있는지를 알아보기 위해 Adam Neely는 Natalie Cole과 Laufey의 'I Wish You Love' 를 비교한다. 오케스트레이션이 들어가 비슷한 분위기를 냈지만 둘의 차이는 분명했다. Laufey는 따, 따, 따, 따, 정박에 강세를 찍고 있었고, Natalie Cole은 스윙했다.
(물론 Laufey의 버전이 보사노바 스타일이라 정확한 비교였다고는 보기 어렵다.)
음'학'적으로 스윙감에 대해서 김현종 교수님께서 말씀하신 바에 의하면 Swing feel이라는 한 가지 용어로 불리면서도 빠른 템포에서는 보통 8분 음표, 중간 템포에서는 셋잇단음표가 쓰이고, 느린 템포에서는 점 8분음 표와 16분음표가 조합되어 사용된다고 한다. 그러면서 덧붙이시길 이것은 절대적인 법칙이 아니라 물리적인 경향성에 의한 특징이지만, 그 자체로 어느 정도 보편성이 있다고 볼 수 있다고 했다.
어렵게 둘러서 왔지만 내가 이해한 바로는 결국 스윙감이란 이데아인 것이다. 곡 안에 있는 모든 음악적 요소는 스윙의 일부를 가지나, 스윙과 일치하지 않는다. 진짜 스윙을 나눠가진 각각의 음, 프레이즈는 스윙을 스케치하면서 스윙의 그림자를 그린다. 비록 참된 스윙은 우리가 보거나 만질 수 없지만, 앙상블이라는 환상 속에서 스윙감은 듣는 사람에게 전해진다.
어쩌다보니 하루키에서 시작해서 먼 길 오게 되었는데, 하고 싶은 말은 언제나처럼
'여러분 재즈를 들어요.'
입니다. ㅎㅎ... 그럼 이만 긋치압 총총
ps. Adam Neely 영상에서 Laufey가 재즈인지 아닌지를 판별하는 기준으로 Wynton Marsalis와 Stanley Crouch 인터뷰에서 제시한 재즈의 판별 기준인 '스윙', '블루스'. '즉흥 연주'를 가져와 '재즈가 아니다'라고 결론지었다.
하지만 오해하지 말아야 하는 게, 재즈가 아니라고 해서 Laufey의 음악이 질적으로 떨어진 것은 아니다. 물론 Laufey는 재즈가 아니지-라는 태도에서 어느 정도 진짜 가짜 논쟁에 과몰입한 재즈팬들의 모종의 우월의식이 느껴지긴 하지만, 그 사람들도 귀가 있다면 어떤 것이 재즈인가의 기준과 어떤 것이 좋은 음악인가에 대한 기준은 분명히 다르다는 것을 알 것이다.
무엇보다 Wynton Marsalis는 알아주는 재즈 계의 꼰대다. Herbie Hancock의 칭찬이 재즈의 정통성을 잇는 연주자임을 증명하는 하나의 훈장이 되는 것처럼, 재즈 사회, 흠 아니 예술 사회는 비슷한 논리로 돌아가는 듯하다.
어쨌거나 Esperanza Spalding도 해내지 못한 죽은 재즈 구원하기를 Laufey는 해냈고, 많은 어린 아이들이 재즈 뮤지션의 꿈을 품고 있다는 사실은 몹시 고무적이다. 얼른 최악의 세대가 자라서 재즈 꼰대들을 물리쳐주길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