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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mewhere Nov 01. 2023

연기암을 걷다

지리산

시계를 보고 내 머리통을 때리고 싶어졌다.

오후 1시 35분 이라니.

구례를 왔는데ᆢ

이 아름답고 청명한 구례를 왔는데 시차적응을 못해 오전을 통째로 날리다니 ᆢ

허겁지겁 먹고 싶지도 않은 점심을 먹고 화엄사로 간다. 화엄사 입구길을 차로 들어서며 바로 후회를 한다.

걸어 들어왔으면 좋았을 것을.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연기암 가는 길로 들어선다.

때는 단풍철일 것 같지만 그다지 단풍이 많이 들지는 않았다.

오는 길도 그렇고 사람이 거의 없어서 좋다.

산천이 이리 좋은데 사람이 없어서 더욱 좋다.

벌써 바삭바삭 마른 낙엽이 수북이 쌓인 지점도 있다.

가을 같구나 ᆢ가을 같다니 ᆢ

내일이면 11월이다. 가을도 늦가을이라 할 만한 때지.

뭉텅 10월 한 달을 여행하고 돌아오니 아직 가을이라 생각할 줄을 모른다. 옷도 너무 얇게 입고 내려왔다.

여름옷을 입다 여행을 떠났고 돌아오니 그 여름옷에서 많이 건너뛰지를 못한다. 아직 옷들을 꺼내지 못한 탓도 있지만.

순천에서 구례로 올 때 아침 안개가 자욱했다. 요즘 아침마다 그렇게 안개가 짙다고 한다. 지리산으로 사방이 둘러싸여 안개가 흘러나가지를 못하나 보다.

<무진기행> 의 무진이 이곳일까 싶을 정도로 구례 전체가 안개에 잠겨있다.

해가 떠 오르면 안개가 걷히고 가장 청명한 가을날이 열린다


연기암은 이상한 암자가 되었다.

아주 오래전 연기암 템플 스테이를 들어간 적이 있다.

템플 스테이란 것이 막 처음 나오던 때였다.

한참 인생의 답답한 시기를 살던 때라 그러저러한 데를 막 쫓아다녔었다.

추울 때였는데 완고하고 고집스러운 스님을 보며 하룻밤 자고 조용히 내려와 버렸다. 견딜 줄을 몰랐다. 아니다 싶으면 그냥 짐 싸서 줄행랑이다.

그땐 딱 한 채의 절집이 있었을 뿐인데 그래서 암자란 말이 어울렸었는데 이제 연기암은 도통 뭐 하는 곳인지 아리송한 곳이 되어 있다.

느닷없이 티베트 스타일의 황금탑이 들어서 있질 않나 거대불상이 서있질 않나 휘 둘러보는데 너무 실망스럽다. 입구에 있는 카페에서 커피만 한 잔 마시고 걸어 내려온다.

화엄사에서 산길로 완만히 올라가니 연기암이 있더라 싶어 걸어 다녀온 것으로 만족이다. 나무가 우거진 산길을 걷는다는 것은 언제든 좋다.


관사로 돌아와 이제는 바삐 자전거를 타고 섬진강을 따라간다. 해가 짧아져서 5시에 출발하면 금방 어두워질 것이다. 화개장터로 들어가는 남도대교까지 가서 턴해서 돌아오니 길은 어둠 속으로 빠져들고 노을이 붉게 가라앉는다. 서쪽 노을을 항해 하염없이 달렸다.

마치 ET가 자전거 타고 달을 향해 날아 가듯 서쪽 하늘 어둡게 가라앉는 노을속으로 자전거가 날아 들어가는듯 했다.


또 새벽 세시를 넘기고 있다.

요즘도 읽는 사람이 있을까 싶다는 헷세의 <유리알 유희>를 다 읽었다. 잠들지 않는 밤에 보기 딱 좋은 책이다.

순천으로 내려오는 차에서 보려고 했던 책은 <리스본행 야간열차>였는데 막판에 책을 찾지 못해 헷세책을 들고 왔다. 드디어 2권 끝을 냈다.


가을은 이제 더 깊을 것이고ᆢ

깊어져야 할 일이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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