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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mewhere Oct 10. 2023

가만히 있는 오후

편안함이 괜찮은가.

새벽 7시에 알베르게를 나서 아직 어두운 거리를 걷기 시작한다. 10월이지만 포르투갈의 한 낮은 너무 뜨겁다.

그래서 새벽에 아침에 많이 걷기로 한다.

막 잠을 자고 나서 인지 혹은 아침 사과와 요거트 때문인지 얼마든 걸을 수 있을 것 같다.

하늘에 새벽별이 빛난다


Ponte de Lima 오래된 돌다리가 아름답던 마을을 떠나 지도 위의 노란 선을 따라 혹은 길거리 위 보물찾기 하듯 있는 노란 화살표를 따라 걷는다.

오늘은 산길이다.

별거 아닌듯한 산길이 배낭을 멘 채로 걸을 때는 별거 아닌 것이 아니게 된다. 두 시간쯤 걸었을 때 나타난 작은 산골 마을 카페에서 진한 커피와 달디 단 파이를 먹고 다시 걷는다.

여행을 떠날 때 무게 때문에 책은 못 챙겼지만 e-book을 저장했는데 안 읽게 된다. 음악을 듣는 것도 아니고 그토록 보던 유튜브도 안 보게 된다.

그냥 걷거나 아무것도 안 한 채로 있는다.

이렇게 글을 쓸 수는 있지만.


상대적으로 짧은 거리를(4시간 반쯤) 걸었던 오늘은 오후가 텅 빈 채로 있다. 동네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들어온 사설 알베르게는 풀장이 있다. 하루 13유로 숙박비인데.

푸른 풀장 썬베드에 누워 가볍게 코를 골고 다가 그저 가만히 누워있다.

풀장 물이 차가운지 수영하려던 서양여자가 진저리를 친다.


이런 한가함 이런 편안함은 왜 슬금슬금 죄책감을 한 스푼 물고 나올까ᆢ불안이나.

뭔가 생산적인 일이나 발전적인 일을 해야 한다는 강박이 있는 세대에 속한 탓일까.

여행을 왔으면 어딘가 부지런히 걷거나 보거나 해야 할 터인데 이리 비어있는 시간 속에 있으니 불안한 건가.

방학 때 여행을 가도 연수보고서를 냈었고 스스로도 하나라도 더 알려고 빠듯했었다.


퇴직하고 제일 어리둥절한 게 그거였다.

아무것도 안 해도 된다는 거.

누가 등 떠밀지도 않고 의무로 해야 할 일도 없다.


내 앞의 시간이 텅 비어 있으면 어떤 일이 생기는가.

시간은 채워야 하는 것인가 ᆢ

불안함 없이, 시간의 그 어떤 구분이나 마디 없이 저 푸르게 고인 물처럼 살아도 되는 것인가.


발끝너머 물을 내다본다.

서양남자하나도 비명을 지르며 들어가던 저 풀장을 한번 들어가 볼까 말까.

차가움에 몸서리를 쳐도 들어가 볼까.

이 고요하고 텅 빈 오후를 흔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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