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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mewhere Oct 14. 2023

어서 말을 해

비 오는 들판

예보대로 아침에 일어나니 비가 내리고 있다.

새벽부터 깨어난 순례자들은 판쵸를 입고 빗속으로 하나 둘 사라진다.

오늘부터는 짐을 부치고 가볍게 걸어가기로 했다.

짐을 하루하루 목적지로 이동시켜 주는 서비스가 스페인부터 가능하다. 그래서인지 스페인 들어서면서부터 부쩍 순례자들이 많아졌다.

짐 없이 걸어가니 세상 홀가분하고 가볍다. 스페인 들어서면서부터 짐을 부쳤어야 했는데 바보같이 꾸역꾸역 이고 지고 걸었다. 나이가 나이인지라 관절 상하는 것을 무서워해야 하는데ᆢ

길에서 만난 한국 젊은이가 짐을 부치고 걷는다길래 비로소 짐을 보내기로 한 우리가 참 미련하다.

짐을 지고 자기의 길을 걷는 것이 이 여행의 의미에 맞다고 생각하는 고지식 세 명이 길을 걷고 있다.

아침엔 걸을 만 하지만 두 시간쯤 지나면 등짝 위 짐이 기세등등하게 위력을 떨치며 나를 부리는 상전같이 된다. 나는 아무 소리 못하고 그 주인을 업어 날라야 하는 노예 같아진다. 심하게 비유하자면.

하루하루 살아가는데 꼭 필요한 것들만 챙긴 것이 그 짐이다. 속옷도 매일 빨아 입게 딱 두 개. 화장품도 스킨로션 딱 두 개 이런 식으로 ᆢ

비워야 하느니라를 배우는 것이 아니라 어쩔 수 없이 져야 하는 삶의 무게를 견디는 것을 배우는 시간이다.


비가 거세었다가 잦아들었다가를 반복하는데 비옷을 입었음에도 다 젖는다. 걷기가 팍팍해서 노래를 들으며 가야겠다 싶은데 무슨 노래를 들을까 생각하니 대학 때 주구장창 듣던 해바라기가 떠오른다.

그 외 다른 노래가 떠오르지 않는 것도 신기하다. 인생 내내 얼마나 많은 노래가 있었는데.


앞 뒤로 사람들과 간격을 벌리고 큰 소리로 따라 부르며 걷는다.


난 눈물이 메마른 줄 알았어요

여태 사랑을 다시 못 할 줄 알았어요 ᆢ


어서 말을 해.

흔적 없는 거리거리마다

말 못 하는 사람들뿐이야

정만 주면 무슨 소용 있나

가고 나면 울고 말 것을 ᆢ


가사를 많이 잊었지만 그래도 거의 따라 불러진다.

하현우가 부르는 백만 송이 장미를 듣다가는 눈물이 흐를 뻔했다.


앞으로 걷기가 제일 힘들 때는 노래를 불러야겠다.


어서 말을 해. 

이 바보야 어서 말을 하라고 소리 질러주는 시원함.


백만 송이 백만 송이 백만 송이 꽃은 피어 그립고 아름다운 내 별 나라를 떠 올릴 수 있게 해주는 것이 노래 빼고 무엇이 있으리.

사랑을 할 때만 꽃이 피어난다니.

백만송이 꽃을 피워내야만 내 별 나라로 갈 수 있다니.


순례길에 이보다 더 좋은 노래가 있을까.


어서 노래를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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