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바꾼 한 아이(연재 1)
나를 바꾼 한 아이
내 나이 스물 여섯! 첫 아이가 찾아왔다. (아들아! 미안하다!) 내게는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일찍 결혼은 했지만 그때의 나는 결혼이란 걸 가벼이 생각했던 것 같다. 결혼하면 나밖에 모르는 남친이 남편이 되는 거고, 잘해주던 남친의 엄마가 내 어머니가 되는 거라고만 생각했다. 아이도 곧바로 가질 생각이 없었다. 나는 계속 공부를 할 생각이었고, 결혼이라는 제도가 나의 인생을 바꿔 놓으리라 생각하지 못했다.
큰 아이는 결혼한지 6개월만에 찾아왔고, 이듬해 나는 큰 아이를 낳았다. 모든 공부는 중단되었고, 꿈을 이루지 못한 채, 기간제 교사를 전전했다. 남편은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사업을 했다. 스물 여섯에 엄마가 된 나도, 스물 여섯에 아빠가 된 남편도 현실의 벽 앞에 고됐다.
잘할 수 있다며 부모님의 반대에도 호기롭게 결혼했것만 먹여 살려야 할 아이가 있었기에 갓난쟁이를 친정 엄마에게 맡기고 일을 나갔다. 돈이 되는 일이라면 뭐든지 했다. 낮에는 학교 기간제 교사로, 밤에는 학원 국어 강사로 일을 했다.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전공을 살려 꾸준히 일을 했다. 대학 때부터 쉬지 않고 학원 강사 생활을 했기에 국어를 가르치는 것은 별로 힘들지 않았다. 단지 그때와 지금은 달라졌으니 시험 기간이 되면 육체의 한계를 느낄 정도 피곤했다. 그러다보니 뭔가 다른 일이 없을까? 시선이 옮겨갔다.
중고등학생만 가르치다가 우연히 초등학교에서도 근무를 하게 되었는데 가만히 보니 초등학교에 방과후 학교라는 게 있는 것이다. 그때 처음 알았다. 그런 세계가 있다는 것을. 그 선생님들을 유심히 살펴보니 매일 출근하는 나와 다르게 일주일에 두 번 출근하고(그것도 밤이 아닌 낮에) 나보다도 많이 월급을 받는 게 아닌가! 담당선생님에게 저건 어떻게 하는 거냐고 물어보았더니 “선생님은 전공도, 경력도 좋은데 한번 이력서 넣어봐요! 바로 될걸요!” 그러는 게 아닌가!
그 선생님의 말에 힘을 얻고 우선 토요 방과후에 이력서를 넣어보았다. 하고 있는 일이 있으니 갑자기 주중 방과후를 할 순 없어서 토요 방과후 강사로 지원해보았다. 덜컥 합격했다. 학교가 수런수런했다. 뒷이야기를 듣자 하니 기존에 유사 과목이 있었는데 누군가 갑자기 새로운 커리큘럼으로 토요일 논술 방과후 제안을 해서 기존 과목을 밀어내고 새 강좌가 개설됐다는 것이다. 음, 좀 미안했지만 나의 사정은 급했고, 새로운 이 문을 두드렸으니 어찌됐든 쟁취하고 싶었다. 결정은 내가 한 것도 아니니 미안해하진 말자, 생각했다.
그리하여 겨우 대학 때 논술 수업 좀 배우고, 알바로 논술 학원에서 일하면서 원장님 논술 첨삭 정도 도와준 게 전부인 내가 논술 강사가 된 것이다. 교재 하나, 수업 한번 진행해보지 않았지만 대학 때 자주 했던 레포트대로 1년 커리큘럼은 멋들어지게 짰고, 그에 따라 수업 교재를 만들었다. 사실 그때는 시중에 파는 논술 교재란 게 있는 줄도 몰라서 그냥 내가 직접 만들어야 되는 줄로만 알았다. 그런 말도 안 되는 뭣모름과 자신감이 도전할 수 있게 한 것 같다.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진 학교, 저녁엔 학원 국어 강사, 토요일 오전엔 논술 방과후 강사. 스리 잡의 생활이 시작되었다. 그런데 생각보다 방과후는 잘 되었다. 월급제가 아니라 아이가 몇 명인가에 따라 교실 사용료, 세금을 떼고 월급이 들어왔다. 그러다 보니 내가 잘만 하면 부수입이라 생각했던 논술 수입이 주수입보다 훨씬 좋은 것이다.
그렇게 저렇게 한 학기가 지나고, 주중반도 만들어달라는 요청이 생겨 주중반도 제안서를 넣었다. 당연히 합격. 모든 일을 접고, 본격적으로 이 일에 뛰어들었다. 방과후 강사 생활에 눈을 뜬 것이다. 한 학교만 제안서를 넣지 않고, 이곳 저곳 여러 곳에 넣었다. 웚요일부터 토요일까지 모든 요일에 수업을 만들었다. 화목은 D학교, 수금은 G학교, 월은 S학교, 토는 다시 D학교. 이렇게 나의 일주일은 구성되었다.
당시 나에게 방과후 강사 생활은 대단히 매력적이었다. 오전에는 남편이 하는 사업(당시 남편은 도소매 꽃집을 하고 있었다)을 도와주고, 오후에는 출근하고, 저녁에는 개인 논술 수업반을 만들어 집에서 논술공부방을 했다. 일하는 시간이 짧고, 개인사업자로 분류되기에 학교의 터치를 별로 받지 않으면서, 내가 학부모를 직접 상담하며 관리하는 점이 내게 있어서는 큰 매력 포인트. 그러다보니 학생수가 계속 늘었고, 아이를 키우면서 하기에 이보다 더 좋은 직업은 없어보였다.
학교에서 근무할 때는 아이가 아픈 날은 비상이었다. 학교는 8시 30분까진 가야하는데(보통 8시까지는 출근했다) 병원은 9시에 문을 여니 아이가 아파도 병원엘 갈 수가 없었다. 결국 주변에 부탁해야 했고, 친정엄마의 도움을 또 받아야만 하는 상황. 그런데 방과후 강사를 하고나서부턴 병원 데려가는 걱정도 없었고, 어린이집 행사 등등 아이에게 엄마로서 필요한 모든 상황을 감당할 수 있었다. 그렇게 나의 생활은 조금씩 안정되어갔다. 그러나 나의 마음 속 한 부분은 아이가 어느 정도 크면 다시 고등 입시 국어로 가고 싶었다. 조그마한 아이들을 상대하는 일은 나에게 맞지 않는 일이라 생각됐다.
그러던 어느 여름날, 한 아이를 만났다. 여름 특강 수업이었다. 여름방학에는 오전으로 수업시간이 조정되고, 한 달만 수강하는 학생이 아주 많았다. 평소에는 듣고 싶어도 시간이 안 맞아 못 듣는 친구들이 대거 수강해서 방과후 강사들에게는 완전 호재의 시간이다. 그때도 평소 모르던 친구들이 많이 들어왔는데 키가 큰 5학년 남자아이가 눈에 띄었다. 서른 명 정도의 아이 중 제일 뒤에 앉아서 고개도 잘 들지 않고, 말을 거의 하지 않는 친구였다.
첫 시간, 만다라를 활용한 나의 마음에 대한 에세이를 쓰는 날, 그 친구의 글을 보고 그야말로 깜짝 놀랐다. 사실 글쓰기 수업을 하면서 그때만 해도 엄마 아빠 욕하는 친구는 많이 보았지만 엄마를 마음속으로 ‘죽이고 싶다’도 아니고 ‘죽였다’는 아이는 처음 보았다.
만다라 속에 아이는 피가 뚝뚝 떨어지는 칼을 그렸다.(이 그림 사진은 그 아이의 그림을 비슷하게 재현한 그림이다. 실제로는 더 끔찍했다) 바탕색은 온통 검정. 신경질적으로 마구 칠한 검정색 선이 이 아이의 거친 마음을 말해주었다. 아이는 원고지에 자신은 이미 엄마를 여러 번 죽였고, 그 이유에 대한 글을 구구절절 써 놓았다. 꽤 긴 글이었다. 사실 아이는 글을 그 시간에 다 써 놓고선 첨삭을 받는 시간 나에게 보여주지 않으려고 했다. 엄마에게 말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한 뒤 글을 읽도록 허락해주었다.
초보 논술 강사에게 그 글은 너무도 무거웠다. 이것을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아이의 글을 온전히 믿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일단 그 아이와 약속을 했기에 엄마에겐 말하지 않기로 했다. 그리고 한 달이란 시간이 지났다. 나는 계속해서 그 아이가 오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엄마와 상담을 진행했다. 좀 둘러서 지금 아드님에겐 이런 수업이 필요하고, 계속해서 이 수업을 들었으면 좋겠다고 말씀드렸다. 그러나 어머니는 딱 잘라서 시간이 없다고 했다. 다녀야할 학원이 너무 많고, 글쓰기 치료 같은 건 필요없다고 했다.
한 달만 수업을 듣고 그만두는 친구가 부지기수였기에 나의 머릿속에서 그 친구는 서서히 잊혀져갔다. 몇 달 후, 다른 과목 방과후 선생님들과 점심을 먹다가 그 아이의 소식을 들었다. 그 아이가 교실에서 우유팩을 발로 밟아 온 교실에 우유가 퍼지고 난리가 나 담임선생님이 훈육하는 중 담임샘 뺨을 때렸다는 것이다. 이 무슨! 그 일로 담임샘 충격은 말도 못했고, 학교가 발칵 뒤집어졌다는 것이다. 그 후 그 아이는 강제전학을 갔다. 또 그렇게 그 아이는 서서히 잊혀져가는 듯했다. 그런데 또다시 그 아이 소식이 들려왔다. 전학간 학교에서 화장실에 불을 질러 결국 퇴학당했다는 것이다.
그런 소식을 전해주는 선생님도, 함께 그 이야기를 나누는 선생님도 모든 사람들이 그냥 뉴스에 나오는 아이처럼 말을 했다. 그러나 나는 아니었다. 몰려오는 강렬한 부채감. 마치 내가 그 아이를 그렇게 만든 것 같은 죄책감. 모든 사실을 말했어야 하는데 말하지 않아 이런 결과를 만들었다는 교사 자질의 문제. 나에게 그 아이는 지진을 일으켰다.
어느 정도 경제가 안정이 되면 초등 논술 따위 접고, 다시 늦은 시간 일은 해도, 고등 국어로 갈아타려했던 마음들이 한순간에 사라졌다. 국어가 문제가 아니다. 내 아이도 이럴 수 있다. 고등학생을 가르칠 때가 아니다. 겨우 열 몇 해를 산 아이들이 이런 생각을 하다니. 이 아이들에게 나의 인생을 한번 걸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그때 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