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은 곡식은 다 떨어지고 햇곡식은 아직 익지 아니하여 식량이 궁핍한 봄철. 정말 그랬다. 어린 나에게 봄은.
그 시절, 시골의 농가에서 춘궁기란 겨울이 가면 봄이 오는 것처럼 어쩌면 자연스런 일이었을까!
내가 초등학교 6학년이 되던 해, 나는 한창 사춘기의 험준한 골짜기를 지나치고 있었다. 이성에 눈을 뜨고, 부끄러움도 많아졌다. 그 시기에 나의 학교에는 급식소가 생겼고, 전교생이 의무 급식을 하게 되었다. 급식비는 대략 2만 원 가량 되었던 것 같다.
그 봄, 나의 집은 극심한 춘궁기를 겪고 있었다. 엄마의 지갑엔 만 원짜리 한 장 없는 날이 부지기수였다. 나는 다니던 피아노 학원을 그만두었고, 이것저것 살 것이 많은 서예부도 그만두었다. 엄마는 시장엘 가지 않고 텃밭의 채소들로 상을 채우셨다. 나는 말은 안했지만 소시지 하나 없는 초원 같은 도시락을 싸지 않아도 되어 내심 급식소가 생긴 것이 좋기도 했다. 그러나 그 즐거움은 오래가지 않았다.
담임선생님께서는 종례에 칠판에 ‘월요일까지 급식비 가져올 것’이라고 쓰셨다. 늦은 봄, 햇살이 뜨거운 토요일 오후였다. 잔인한 급식비였다. 분명, 엄마는 저번 달 서예부에서 벼루와 붓을 사야 한다고 했을 때처럼, 피아노 레슨비 봉투를 건냈을 때처럼, 찹찹한 얼굴로 나를 멀거니 건너다 보실 것이었다. 정말 속된 말로 안 봐도 비디오였다. 나는 엄마의 그 멀건한 눈이 안쓰러워 이제 피아노는 치기 싫다, 하였다. 맨날 선긋기만 시키는 서예부는 재미 없다, 하였다. 그런데 이번엔 달랐다. 아무리 엄마의 눈이 흔들려도 점심밤 먹는 것이 싫어졌다고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주말 내내 나는 언제, 어떻게 엄마에게 말을 할까,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그러다 몰래 엄마의 분홍색 지갑을 열어 보았다. 아직도 기억이 생생하다. 흰색 레이스가 중간에 한 줄 있었던. 잔꽃무늬가 잔뜩 그려진 연분홍의 천지갑. 그 속에는 천 원짜리 넉 장과 몇 개의 동전이 전부였다. 혹시나가 역시나가 되는 순간이었다. 일요일 저녁, 저녁밥상을 치우고 설거지를 하는 엄마의 옆에 쪼그리고 앉아 나는 엄마의 뒷모습을 보고 있었다.
“니 거기서 뭐하노?”
“그냥…….”
“그냥이 어딨노? 니 무슨 할 말 있나?”
“…….”
“니 학교에서 와 급식비 가져오란 말이 없노? 저번 달에도 이쯤 되면 가져오라 하더만.”
귀신같은 엄마. 난 놀라서 뒤로 나자빠지는 줄 알았다.
“사실은 월요일까지 가지고 오라고 했는데.”
“그람 진작에 말하지. 만다고 그리 쪼그리고 앉아 있노? 들가 있거라. 줄테니까.”
나는 신이 났다. 엄마는 허튼 소리를 안 하니 분명 어딘가에 내 급식비를 두셨을 것이다. 나는 펄쩍펄쩍 뛰며 방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방으로 들어오신 엄마는,
“은아! 엄마 돼지 저금통 가지고 온나.”
“그건 뭣하게?”
“가지고 오라모 가지고 온나.”
그날, 엄마는 돼지를 잡았다. 엄마는 늘 돼지를 키운다. 나는 잘 기억나진 않지만 엄마의 일기엔 내가 초등학교 가기도 전, 아주 어릴 적 동네 언니들이 우리집에 놀러와 함께 돼지를 잡아 온 동네 언니 오빠들에게 돈을 나누어 준 적도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호되게 야단을 맞았다고 한다. 그 옛날부터 엄마는 늘 돼지를 키우고, 또 잡고, 키우고를 했던 것 같다.
돼지 배를 가르니 동전들이 쏟아져 나왔다. 10원짜리부터 500원짜리까지 다양한 동전들이 짜르르 소리를 냈다. 그 소리가 어찌나 정겹던지 나는 동전을 세는 엄마 옆에서 동전들을 주물럭거렸다. 엄마는 500원짜리와 100원짜리 중심으로 급식비에 딱 맞게 하얀 봉투 속에 넣어 주셨다. 나는 그것을 받아 들고 좋아라 나의 방에 갔다.
다음 날, 나는 당당히 학교엘 갔다. 총무는 벌써부터 급식비를 받고 있었다. 총무의 아빠는 일명 우리가 시내라고 부르는, 그 시골에서는 나름 번화가인 곳에서 중국집을 한다. 그래서 그런지 늘 뚱뚱한 풍채를 자랑하며 새까맣고 깡마른 나를 비아냥 거렸다. 많은 농부의 딸들 중에서 농부의 딸이 아닌 그 아이. 2층 집에 살며, 피아노를 가지고 있었던 그 아이. 피아노 대회에 나가 자기 보다 내가 높은 상을 받게 되어 울었던 그 아이. 나는 그 아이에게 급식비를 내지 못했다. 아이들은 다들 시퍼런 만 원짜리 두 장을 내었다. 그 어느 아이도 동전으로 급식비를 내는 아이는 없었다. 시퍼런 만 원 짜리. 아이들은 만 원 짜리를 들고 거스름 돈을 남겨 달라고 아우성들이었다. 그 아이들의 손이, 목소리가 얼마나 멋져 보이던지. 나는 가방 속에서 동전 봉투를 꺼내지도 못하고 봉투만 만지작댔다. 어느새 아이들은 급식비를 다 내고 남은 건 나 하나였다.
“야! 하주은! 니만 급식비 안 냈다. 안 내고 니 뭐하노?”
아이들의 시선은 나에게 다 몰렸다. 나는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안 내는 것 보다는 내는 것이 더 낫다는 생각으로 나는 묵직한 동전 봉투를 꺼내어 총무에게 주었다. 나의 눈은 총무의 입술에 집중됐다. 쿨렁거림으로 내 속의 장기들이 마구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 같았다.
“이게 뭐야? 나더러 이걸 도대체 어떻게 세란 건데.”
“안 세도 된다. 엄마가 딱 맞게 줬다.”
“그래도 어떻게 안 세는데?”
총무는 역시나 잔뜩 얼굴을 찡그렸다. 그때 한 아이가 말했다.
“주은이가 동전을 많이 가져왔으니까 니는 고맙다고 해야지 왜 짜증이고? 니 애들 거스름 돈 안 줄끼가?”
나는 놀라 그 아이의 얼굴을 빤히 보았다. 나를 보며 환히 웃는 그 아이, 엄지 손가락을 세우며 입모양으로 ‘잘했다!’ 하던 그 아이. 나는 와락, 눈물이 일어날 것 같았지만 그 아이를 따라 웃어 보였다.
상황 역전! 아이들은 저마다 그 아이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총무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일 후로 나도 내 방에 꼭꼭 돼지 한 마리를 키웠다. 그리고 1년에 한 번 엄마의 생신에 그 돼지를 잡아 작으나마 엄마의 생신 선물을 사 드렸다. 어른이 된 나는 이제 그 돼지를 겨울에 잡아 불우이웃돕기를 한다.
겨울 지나 따뜻한 봄이 되면 가슴 아래 저 어딘가가 저릿저릿하기도 함은 그때 그 시간 때문일까! 찬 기운 따라 따뜻한 기운 묻어오면 가슴 아래 괜시리 따뜻해지는 건 엄지 손가락 세워주던 그 아이 때문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