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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삼십대 제철 일기 Jul 27. 2024

화장실 좀 다녀와도 되겠습니까?

사회초년생은 어려워(상)

내가 처음 사회생활을 시작한 것 스물다섯 살 때였다. 당시 5평짜리 낡은 다세대주택에 살던 나는 출근을 앞두고 잠이 오지 않아 방 안을 서성댔다. 현관에서부터 가장 먼 곳까지 다섯 걸음이면 도착하는 작은 방을 배회하면서 생각했다.


'얼른 돈 많이 벌어서 큰 집으로 이사 가야지!'


나는 결국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 채로 첫 출근을 해야 했다. 검은색 치마 정장에 적당한 높이의 굽이 있는 구두를 신고 거울 앞에 섰다. 마치 남의 옷을 빌려 입은 것처럼 낯설었지만 '진짜 사회인'이 된 것 같아 어쩐지 자꾸만 배시시 웃음이 났다.


10년 전만 해도 커뮤니티에서 공유되는 '회사생활 잘하는 법'은 주로 정공법이었다. 지금은 사회초년생이어도 본인의 이익을 챙기기 위해 행동하는 경우도 많다고 들었다. 가령 퇴근 시간 칼같이 지키기, 회식 빠지기, 막내라고 식당 가서 물 따르지 말기 등등.


여기서 '라떼는 말이야~'를 시전 해보자면, 나 때는 무조건 정공법이었다. 일찍 다니고, 찾아서 일을 하고, 막내로서 깍듯이 행동하는 게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난 그때의 습관이 몸에 배어 있어 아직도 어딜 가서든 식당에 가면 먼저 물을 따르고 수저를 놓는다. (그게 어려운 게 아니니까!)


나는 출근 시간보다 30분이나 일찍 도착했다. 바짝 언 상태로 회사 분들에게 인사를 다니고 교육 자료를 받으며 정신없는 오전 시간을 보냈다. 내가 속한 팀에는 날 포함해 총 6명이 있었다. 보통은 바로 위 연차 선배를 사수로 붙여 주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나는 부서의 차장인 '넘버 2'를 따라다니게 됐다.


나와는 스무 살 차이가 나는 분이었다. 20대 중반 때는 서른만 넘겨도 무진장 어른으로 보이는 법. 양복에 넥타이까지 한 40대 중반의 차장님은 그야말로 '무지막지한 어른'처럼 보였다. 나는 차장님을 올려다볼 때마다 아주 높은기둥을 올려다보는 착각에 빠지곤 했다. 심리적 높이감(?)이었으리라.


입사 이틀차, 회사를 벗어나 외부 공유 오피스 같은 곳에서 잠시 업무를 일이 있었다. 차장님은 업무 처리에 정신이 없었고, 나는 보조 업무를 하고 있었다. 상당히 간단한 일이었기에 금방 금방 끝냈는데 그럴 때마다 차장님에게 직접 가서 보고를 했다. 자리로 돌아오니 바로 옆에 앉아 있는 차장님에게 메신저가 와 있었다.


「간단한 보고는 모두 메신저로.. 」   


바로 옆에 앉아 있어도 상사에게 메신저로 보고하다니! 꽤 놀랐던 기억이 난다. 메신저 보고는 훨씬 편하고 업무 하는데 집중력을 깨지 않는 방법이었다. 나는 업무를 처리했음을 메신저로 보고한 뒤 다음 업무 지시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차장님은 상당히 바빠 보였다. 사회 초년생일 때는 시키지 않아도 일을 찾아서 하라는 조언을 듣고 온 터라 마음이 불안해졌다. 나는 눈치껏 교육 자료를 훑어보면서도 온 신경이 차장님에게 가 있었다. 일을 하겠다고 왔는데 막상 할 일이 없으니 초조해졌다. 그때 차장님이 메신저를 보냈다.


「 빠르네ㅎㅎ 쉬고 있어 」   


보잘것없는 업무였지만 처리가 빠르다는 칭찬에 살짝 웃음이 났다. 'ㅎㅎ' 표시를 써 준 게 감사하기까지 했다. 내가 마음에 든다는 걸까? 나 일을 잘하는 스타일인 걸까? 나는 작은 칭찬에 너무나도 기뻐하며 감사하다는 답장을 보냈다. 하지만 곧바로 다시 불안해졌다.


쉬고 있으라는 게 무슨 뜻이지?


별 일 아닌 것도 모든 게 처음인 사회초년생에겐 수수께끼로 다가온다. 지금이라면 너무 쉽다. 의역해보면,


쉬고 있어=당장 할 일 없으니 굳이 뭘 찾아서 하려고 하지 말고 쉬고 있어라. 그렇다고 너무 티 나게 카톡 하거나 인터넷 서핑하지 말고. 교육 자료를 보든가 적당히 회사에서 할만한 걸 해라.


하지만 저 때는 너무나도 어려운 주문이었다. 쉬라는 건 잠깐 나갔다 오라는 건지, 아니면 말로만 그렇게 하는 건지, 도대체 나는 어떤 모습을 보여야 할지가 혼란스러웠다. 나는 교육 자료를 봤다가 아까 내가 처리한 업무를 다시 들여다봤다가 상당히 불안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영 똥줄이 타니 화장실이 가고 싶어졌다. 그때만 해도 나는 커피를 입에도 안 대는 스타일이었다. 하지만 회사에 다니니 모두가 커피를 마셨다. 잠깐 쉬러 갈 때도, 이야기 좀 하자고 할 때도, 회의를 할 때도, 밥을 먹고 나서도 자연스럽게 커피를 마셨다.


마실 줄도 몰랐던 커피를 마시면서 느낀 건, 커피의 상당한 이뇨 작용이었다. 가뜩이나 눈치가 보이는 마당에 화장실이 너무 가고 싶은 게 아닌가! 난 고민이 됐다. 회사라면 재빨리 화장실에 다녀오면 될 일이었지만. 이곳은 생전 처음 와보는 곳이라 화장실이 어디에 있는지, 얼마나 걸릴지 알 수도 없었다.


말없이 나갔다가 생각보다 늦게 돌아오게 되면 어쩌지. 공연히 걱정이 됐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소심 그 자체다. 하지만 그때는 너무 어렸고, 잘 보이고 싶었고, 지나치게 성실한 모범생이었으니... 결국 하고야 만 것이다. 그 질문을!


「저 화장실 좀 다녀와도 되겠습니까? 」


아이고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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