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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삼십대 제철 일기 Mar 05. 2019

남의집살이-4

이십구달팽이를 건드리지 마시오.

고등학생 때 ‘윤리와 사상’ 교과 시간이었다. 키는 작지만 체격이 다부졌던 선생님은 뒤꿈치를 드는 일이 있어도 판서를 고집하셨는데, 굉장히 악필이어서 필기하는데 애를 먹었다. 그런데 이날의 판서는 짧고 명료했다. 선생님은 화이트보드에 검정색 보드마카로 ‘인(因)’, ‘연(緣)’, ‘과(果)’를 한 글자씩 떼서 삼각형으로 배치한 뒤 글자끼리 죽-죽- 선으로 이었다.      


“인연이 뭐라고 생각하냐?”
“연인 같은 거요.”
“그런 건 학교에서 배우지 않아도 다 안다. 한자를 해석해봐.”
“몰라요오.”     


나도 ‘몰라요오’ 중에 한 명이었다. 그때만 해도 인연이란 무릇 관계가 맞닿는 것에서 그 의미가 한정된 줄 알았다. 그러나 불교식으로 보면 달랐다. 어떤 결과를 만들어내는 직접적 원인은 ‘인(因)’이라 하고, 인과 협동해 결과를 만드는 간접적 원인을 ‘연(緣)’이라 했다. 인이 있어서 연을 만나면 반드시 결과(果)가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인상적이었다. 만남 속에 원인이 있고, 그로 인해 결과가 나온다는 게.      


“원인이 있으니 결과가 있고, 그 결과는 반드시 내게 영향을 미치니 상생하며 착하게 살라는 거다.”      


선생님의 간단명료한 설명에, 나는 칠판 위 삼각형 모양으로 적힌 세 글자를 보면서 입을 떡 벌렸다. 나도 모르는 새 촘촘한 그물망에 걸려버린 해초가 된 느낌이었다. 세 글자는 내가 어른이 돼서도 삼각형을 유지하며 나를 따라다녔다. 인연, 인과, 응보. 내가 저지른 만큼 돌려받았고 내가 도운 만큼 도움받았다-물론 당시엔 알지 못했으나 훗날 돌아보니 그랬다.      


어릴 적 나의 인연은 넓고 얕았고, 크면서는 좁고 깊어졌다. 자연스러운 수순이자 만족스러운 성취이기도 했다. 하지만 좁고 깊은 우물에 들어갈수록 작은 말소리나 움직임도 거칠게 울렸다. 그 안에서 살기에도 여간 조심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우물 밖 세상은 이미 관심 밖이었다. 나름 만족하며 살았으나... 내가 최근 겪은 일들은 모두 우물 밖 세상에서 벌어진 일. 조금도 예측할 수 없었지만, 어쩌면 지나치게 외면하고 있었기에 위기가 닥쳐오는 것조차 모르고 있었던 게 아닐까. 나는 원인을, 화살을, 자꾸 내게 돌렸다.

    

(서론이 참 길었다.) 임대인이 적반하장 식으로 나오는 것도 내게 원인이 있다고 생각했다. ‘내가 이사 간다는 얘기를 조금만 더 미리 말했더라면’, ‘더 곰살맞게 굴 걸.’, ‘재촉하지 말고 좀 더 기다렸다면….’ 그러나 임대인과의 통화에서 나는 그 어떠한 원인도 내게 없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임대인은 귀찮다는 듯이 전화를 받았다. 그리곤 생각나는 대로 말을 뱉어내는 듯 했다.     


"제 방이 계약됐다고 들어서요. 이사는 저번에 말씀드렸듯이 2월 16일에 하면 되는 거죠?"
"아니요. 계약한 사람이 2월 21일에 입주한다니까 그때 이사 가세요."(파 워 당 당)
"그럼 그전에 전세금 주시는 건가요?"
“아이 참 저번에도 말했잖아요. 내가 세입자한테 전세금을 받아야 줄 거 아니에요.”
“... 21일에 세입자가 들어오면 그 전세금을 받아서 주시겠다는 건가요?”
“받으면 줄 테니까 그전에 이사 가세요.”
“아...(탄식)”
“아 그리고요. 청소 좀 해놓으세요. 깨끗이.”     


어? 인이고 연이고 뭐고, 이건 도무지가 상식적으로든 불교적으로든 그 어떤 개념을 대입해도 이해가 안 가는 결과 아닌가. 사람의 행동에도 개연성이라는 게 있지 않나. 그 치가 내 안에 잠자던 분노에 습한 입김을 불어넣었다. 잔뜩 부풀어 오른 분노 덩어리를 당장이라도 터뜨려버리고, 아니 할퀴고 뭉개 바람이 쪽 빠질 때까지 짓이겨 버리고 싶었으나. 나는 따지지도 못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의 스탠스는 ‘돈 받을 때까진 참자’였다. 그때는 그래야 되는 줄 알았다.      


아무리 검색을 하고, 주위에 조언을 구해본다 한들 세입자의 위치가 바뀌겠는가. 당장 할 수 있는 내용증명, 임차권 설정 등의 조치는 강제적으로 전세금을 돌려받을 수 있는 방법이 아니다. 심리적인 압박감을 주는 정도. 이 방법을 쓰면 오히려 삔또가 상해 ‘해볼만큼 해봐라’ 식으로 나오는 임대인도 있다더라. 그게 아니면 변호사를 선임하고 법정에 서는 방법밖에 없다. 결국 ‘내 돈’을 빠르고 명쾌하게 받아내는 방법은... 없었다.    

  

더 화가 나는 건, 내가 아주 열심히 그 집을 청소했다는 거다. 그때 나의 호구력이 만렙을 찍은 것 같다. 분하고 억울한 마음을 담아 아주 빡빡- 구석구석 열심히 닦고 쓸었다. 고등학교 때 배운 ‘인연’이라는 의미를 상기했다. 살면서 내가 저지른 과오로 인해 묻은 얼룩이라 생각하며 빡빡 닦았다. 개미를 밟았거나 혹은 친구 뒷담화를 했거나 불쌍한 사람을 돕지 않았거나, 그런 일들을 떠올렸다. 그 치와의 관계에서가 아니어도 언젠가 행한 나의 과오가 지금의 고난으로 흔적이 남았겠거니. 분연히 나를 닦달하고 야단치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가장 만만한 상대인 ‘나’를 혼냈던 거다.      


이사가 2월 21일로 미뤄지면서, 이사 가야 할 집에는 입주를 미룬 만큼의 일별 월세+관리비를 내게 됐다. 큰돈은 아니었지만 그야말로 생돈이었기에 마음이 쓰라렸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나는 이 시기에 업무적으로 매우 바빴다.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줄어들자 집에 대한 애정도 빠르게 식었다. 좁디좁은 방은 컴컴한 엘리베이터처럼 느껴졌다. 익숙함에서 오는 지루함보다는 나이 듦과 사회화의 과정이었다. 한밑천이었던 20대가 끝나가자 방이 더욱 좁게 느껴졌다. 첫 화에 등장했던 아는 동생의 멘트를 기억하는가. “누나, 사람답게 살기 위한 최소한의 면적이 9평이래요.” 난 절반 정도 되는 방에서 2년을 살았으니, 2년 정도는 반쪽 사람이었던 셈이다.


그렇게 있는 듯 없는 듯 살았다. 그 작은 방에서. 그러던 어느 날, 자정이 다 돼서 퇴근을 한 날이었다. 늦은 밤이 촉촉이 저물어갈 시간이면 마음도 요동친다. 여느 때와 같이 버스 정류장에서 내려 집으로 걸어오는데 익숙하던 그 길들이 색다르게 보였다. 집 근처에 있던 영화관이나 편의점, 식당 따위의 편의시설이 공연히 애틋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집 앞의 주스 가게에서 홍시 주스를 아주 큰 사이즈로 샀다. 홍시 주스를 빨대로 쪽쪽 빨아먹으며 ‘가까이서 얻는 이 달콤함도 이젠 끝이구나.’라고 생각했다. 청승이었다. 아마 술 한 잔을 걸친 탓에.     


1월 말, 차가운 공기가 사방팔방 깔린 그 밤에 나는 커다란 홍시 주스를 품에 안고 집으로 향했다. '이제 이사 갈 때까지만 버티면 돼. 시간은 금방 흐를 거야.'라고 스스로 위안하면서. 주스 가게 사장님은 홍시 주스를 건네며 말했다. "좀 시게 느껴질 수도 있어요. 마지막 손님이라 홍시를 아주 많이 넣어줬거든요." 하지만 주스는 달디달았다. 건물에 들어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방으로 향하는 내내 나는 홍시 주스를 한 스무 번쯤 빨아댔던 것 같다.      


그제야 신맛이 느껴지려는데, 집 앞에 누군가 두고 간 손 편지 한 장이 눈에 띄었다.


이것은 또 다른 고난의 서막이다.       


♣ 이십구달팽이의 한마디. 청소? 제발 하지 마라

방을 뺄 때 전세 보증금을 받으려고 집주인의 요구를 다 들어주는 경우가 있다. 호구같은 짓이다. 그럴땐 일단 계약서를 꺼내서 내용을 확인하라. 보통 원룸 계약서에는 청소 여부도 계약 사항에 넣는다. 이사할 때 청소비를 일정 금액(3~5만원 정도) 내도록 하는 등 청소를 의무 계약 사항으로 명시해놓는다. 하지만 그런 내용을 계약상 넣지 않았고, 본인이 입주했을 때도 청소가 돼 있지 않았다면 사진을 찍어놓거나 집주인에게 해당 사실을 문자로 보내 증거를 남겨 둔다. 다만 다음 입주자를 위해 기본적인건 말끔히 치워놓고 나가는 매너는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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