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삼십대 제철 일기 Mar 02. 2019

남의집살이-3

이십구달팽이, 이젠 남의 집까지 팔아주네


권불십년 화무십일홍(權不十年 花無十一紅)이라 했다. 

‘아무리 막강한 권력이라도 10년을 넘지 못하고, 아름다운 꽃도 열흘을 넘기기 힘들다’. 


웃기는 소리. 사회에선 다르다. 막강한 권력은 대대손손 이어지고 가녀린 꽃만 진다. 우리나라에선 조물주 위 건물주(임대인)다. 건물주의 권력이란 나는 새도 떨어트린다. 이것은 세입자의 인식 속에도 박혀버리는 게 문제다. 애초에 기가 죽어 시작한다는 뜻이다. 나의 싸움이 그랬다.      


임대인은 통화 내내 시큰둥했다. 마치 내가 그 치에게 돈을 빌리고 조금만 말미를 달라고 애원하는 것처럼. 최대한 공손하고 예의 바르게 건넨 말들엔 무성의하고 무개념 한 대답이 따라 돌아왔다. 여러모로 ‘어려운 통화’였다. 무릇 대화는 핑퐁처럼 이어지지 않는가. 그 치와의 대화는 인정사정없는 자동 탁구 머신을 켜놓고 어디로 튈지 모르는 탁구공을 정신이 혼미해질 때까지 혼자 받아내는 느낌이었다. 그 치는 내가 공을 받아내기도 전에 또 다른 공을 쏟아냈다. 내 낯빛이 허옇게 질릴 무렵, 퉁명스레 뱉은 그 치의 말이 걸작이었다.      


“내가 전세금 노력해본다고 했잖아요? 근데 자꾸 전화하면 좀 그렇다고. 나는 독촉받는 걸 아주 싫어하는 사람이야.”     


가까스로 받아낸 탁구공들이 주루루룩- 바닥에 떨어졌다. 전화는 끊어졌고, 내 머릿속 퓨즈도 나갔다. 제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자니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흘깃 눈길을 줬다. 마치 내가 길거리에 있어야 할 어떤 사물-전봇대라든가 오토바이라든가-을 어설프게 흉내 내고 있는 기분이었다. 어서 여느 사람과 다르지 않게 시선을 내리깔고 바쁘게 이 길을 지나가라고, 누군가 눈치라도 주는 양. 나는 고개를 떨구고 최대한 상황을 논리적으로 생각해보려 애썼지만...


‘환장하겄네.'


논리가 필요 없었다. 전세금은 ‘내 돈’이니까. 약속한 대로 내 돈을 달라는데 무슨 논리가 더 필요한가. 내 돈을 돌려받아야 하는 걸 친절히 예고까지 해주고, 공손히 반환일을 묻고, 대화의 말미엔 항상 감사하다-빌어먹을-고 덧붙였다. 나는 시종일관 톡톡, 아주 살며시 날계란을 깼는데, 계란 껍질이 사정없이 노른자에 박혀 노른자까지 보기 싫게 퍼졌다. 뭐가 문제였을까. 


전화 통화 시간은 짧았다. 5분 정도. 그러나 충격의 여운이 길었다. 휴대폰을 쥐고 있던 내 오른손이 찬바람을 맞으며 점점 굳어갔다. 주먹을 꼭 쥐고 있던 내 왼손은 빨갛다 못해 서슬 파랗게 변했다. 후하 후하. 콧김이 나오긴 또 오랜만이다. 성난 황소처럼. 내가 네 발이 아닌 두 발로 서 있는 게 신기할 정도로, 나는 한동안 분노의 콧김을 내뿜었다.      


결국 입주일을 2월 16일로 미뤘고, 나의 밤은 더 길어졌다. 이사까지는 한 달도 채 남지 않은 상황이었다. 새 대출을 받으려면, 이전 대출을 상환해야 했고 나는 결국 ‘엄마찬스’를 썼다. 그 치에게 전세금을 돌려받으면 바로 엄마의 돈을 갚겠노라고 했다. 물론 나의 불안한 상태에 대해선 함구했다. 다 큰 딸이 혼자서도 멋지게 해결하는 모습을 보여주리라. 나는 힘을 냈다. 1월은 새 집을 구하고, 대출을 갚고, 또 다른 대출을 받는 것만으로도 바빴다. 직장인으로서는 굉장히 벅찬 일과다.      


이로써 내가 할 일은 모두 끝이 났다. 전세금을 받아 이사 가서 잔금을 치르면 나의 새집 살이-그래 봤자 남의집살이의 연장이지만-는 시작된다. 떨리는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보냈다. 그러나 이사 날까지 3주 정도 남았을 무렵, 이상한 기운이 느껴졌다. 너무 고요했다. 이쯤 되면 시끌벅적 까진 아니더라도 성가셔야 하는 게 아닌가. 

     

‘왜 아무도 집을 보러 오지 않지...?’     


1월이면 개강 등을 맞아 이사를 준비하는 시기다. 내가 살던 방은 역세권인 데다 가격이 저렴(5천만 원)해 한 번쯤은 젊은이들이 보러 올 법한 방이었다. 머릿속 형광등이 깜빡깜빡, 밝은지 어두운지 가늠이 가지 않을 정도로 깜빡댔다. 그제야 나는 임대인에게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부동산에 방을 내놨다면 보러 오는 이들의 편의를 위해 내가 짐을 좀 미리 빼두는 게 낫겠냐고 에둘러서 물어봤다. 그러자 임대인은 "부동산에 내놨는데 연락이 없다"고 답했다말도 안 돼.     


목마른 놈이 우물을 판다. 나야말로 극심한 갈증에 매일 밤 방바닥을 긁는, 아주 기가 막히게 목마른 놈이 아니던가. 나는 임대인에게 양해를 구한 후 직접 부동산이나 인터넷에 매물을 올리기로 했다. 네이버 지도를 켜고 가까운 곳부터 먼 곳까지 닥치는 대로 부동산에 전화를 걸어 방을 내놨다. 그리고 그 어떤 부동산에도 내 방이 매물로 나와 있지 않다는 걸 알게 됐다. 그러던 중 한 부동산 중개업자가 아는 체를 했다.


"아, 거기 oo빌이죠? 거기 집주인이랑 어제도 통화했는데 월세만 내놓고 전세는 안 내놓던데?"


아직도 그 치가 무슨 생각으로 그랬는지 모르겠다. 전세금이 없다면서 왜 방을 내놓지 않았을까. ‘아쉬운 사람이 알아서 해라’였을까. 만약 그 의도였다면 그 치는 고단수다. 내가 아주 안달이 났었기 때문이다. 이미 집 계약은 다 해놓은 상태에서 잔금을 치르지 못한다면-부동산 중개업자와 잘 얘기해서 전세금을 받을 때까지 일별 월세로 살기로 특약(구두·口頭)을 걸어뒀다-내 입장이 매우 곤란해진다. 난 부지런히 인근 부동산 12군데에 매물을 내놨고, 그때부터 집을 보러 오겠다는 연락이 자주 왔다. 


'하다 하다 이제 내가 남의 집까지 팔아주네.'     


억울해도 어쩔 수 없었다. 집 정리를 깔끔히 한 뒤 구석구석 사진을 찍어서 부동산에 보내거나, 사진 찍으러 나오면 자리를 비켜주기도 했다. 계약 조건들을 설명하고 전화를 받는 것도 일이었다. 그래도 관심을 보이는 이들이 많으니 곧 방이 나가겠거니, 하는 마음에 조금쯤 안심이 됐다. 그러다 1월 28일, 부동산으로부터 계약이 됐다는 연락이 왔다. 


그런데 집주인은 잠잠했다. 기가 찼다. 내가 연락한 부동산에서 계약자와 연결이 됐으면서 언질조차 없다는 게 화가 났다. 하다못해 언제까지 짐을 빼달라던가, 하는 최소한의 공지는 있어야 하는 게 아닌가. 결국 목마른 내가 또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후회했다. 그 치의 말이 아주 가관이었다.  



♣ 이십구달팽이의 한마디. 먼저 선수쳐라

혹시나 전세금을 돌려받지 못할 것 같다면 다음 세입자를 직접 구하는 게 가장 빠른 방법이다. 생각보다 많은 집주인들이 계약 만료 이후의 상황에 대해 준비해놓지 않는다. 다음 세입자를 구하는 건 집주인이 할 일이지만, 계약금을 빨리 받기 위해선 먼저 선수치는 것도 좋다. 계약 만료를 고지한 후에 부동산이나 인터넷 커뮤니티에 내 방의 정보를 올려놓으면 된다. 특히 부동산에 방을 내놓을 때는 가까운 곳부터 멀리 있는 부동산까지 이용하는게 좋다. 세입자들의 생활권이 각기 다르기 때문이다. 최대한 여러 부동산에 방을 내놓고 어느 부동산에 내놨는지도 꼼꼼히 적어놓자. 어차피 전화로 하면 된다. 


이전 02화 남의집살이-2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