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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삼십대 제철 일기 Feb 26. 2019

남의집살이-2

이십구달팽이가 고하느니 "전세금은 네 돈이 아니라 내 돈이다"

'호구가 되느냐, 호구를 잡히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세입자는 호구가 되기 십상이다. 특히 사회초년생 어리숙한 세입자일수록 자발적이거나(본인의 정신건강을 위해 다 내려놓는), 비자발적인 호구가 돼 버린다. 나는 20대 내내 호구였고, 남의 집 살이를 할 때 호구력이 더 두드러지는 편이었다.      


9평짜리 전셋집을 구하고 나선 나의 호구 이력도 마침표를 찍는 줄 알았다. 그러나 거대한 산이 하나 남아 있었다. 전세보증금. 임대인은 전세 계약이 만료될 때쯤 되자 그동안 감춰왔던, 다 썩어 빠져 문드러진 송곳니를 드러냈다. 그다지 위협적이지 않으면서도 추악한 태도였다. 그러나 송곳니는 송곳니, 가장 날카로운 치아. 입질 한 번이면 세입자를 비(比) 물리적으로 죽일 수 있었다.   

   

앞서 말했던 5평짜리 전셋집의 계약 만료일은 2019년 2월 10일이었다. 나는 지난해 7월경 임대인과의 통화에서 계약 만료에 따른 계약 해지(이사) 의사를 처음으로 밝혔다. 당시 임대인은 “이사 여부는 나가기 한 달 전에만 말해도 된다”고 했다. 어리석게도 나는 당시 통화 내용도 녹음하지 않고 그 말에 철썩 같이 따랐다. 그리고 11월 다시 한번 의사를 밝혔고, 12월 공연히 불안함을 느낀 나는 증거를 남기기 위해 문자로 계약 해지를 재 고지했다.     

 

주택임대차 보호법에 따라 임차인은 계약 해지일로부터 최소 1개월 전에 계약 해지를 고지해야 한다. 나는 충분한 기간을 두고 계약 해지를 고지한 뒤 새로 이사 갈 집을 구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임대인은 담담하게 “알겠다”고 답할 뿐이었기 때문에, 별다른 걱정을 하지 않았다. 나는 계약 만료일에 맞춰 대출과 새 집 이사를 준비했다. 가계약금을 걸고 본계약을 남겨둔 상황에서 임대인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세보증금 반환을 묻기 위해서다. 나는, 이때의 충격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      


"안녕하세요? 제가 전에 말씀드렸듯이 2월 10일에 전세 계약이 만료돼서요. 전세 보증금을 언제 받을 수 있을까요?"
"..."
"여보세요?"
“이사는 왜 가요? 그냥 더 살지.”
“네? 이전에 이사 간다고 몇 번 말씀드렸었잖아요.”
“알아요. 근데 지금 돈이 없는데?”     


소오름. 난 아직도 이때의 상황을 기억한다. 적당히 소란스러운 카페에서 커다란 창으로 새어 들어오는 햇살을 맞고 있었다. 노트북과 다이어리를 펼쳐놓은 채, 새 집으로의 이사를 앞두고 ‘인생 2막’이라며 인생의 장을 나누고 있었다. 아주 유치하고 천진난만하게. 전세금은 세입자의 돈이니까 당연히 돌려주겠거니, 생각하며 티 없이 해맑게 전화를 걸었던 나였다.      


임대인은 아주 가끔씩 겸연쩍어할 뿐, 말 사이사이에 공백을 두다가도 나의 말은 싹뚝 끊어내며 당당한 태도를 보였다. 당황한 나는 조심스럽게 보증금 반환 시기를 물었다. 그러자 임대인은 ‘노력해보겠다’는 찢어진 비닐봉지처럼 쓰임새 없는 말을 남긴 채 전화를 끊었다. 나는 이 상황에 걸맞은 욕지거리를 찾아 헤매다가 결국 외마디 소리를 뱉었다. 헐.      


그 날부터 나의 밤은 길었다. 실오라기 하나만 빠져도 안감 전체의 짜임이 풀려버리듯, 전세 보증금을 제때 받지 못하면 대출, 이사, 잔금 등 줄줄이 엉켜버리기 때문이다. 아무리 계산기를 두드려 봐도 전세금 없이는 새 집으로의 이사가 불가능했다. 나의 상황을 전해 들은 한 친구는 따지듯이 말했다. “봐라, 응? 집주인이 60대고 서울에서 임대 사업하지? 근데 너한테 줄 전세금 5천만 원이 없다고?” 질문의 의도는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절박한 나는 임대인의 상황을 이해하려 애썼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결국 전세금을 주겠다고는 했잖아? 일부러 그러는 게 아니라 그동안 공실이 없어서 대비가 부족했다는데, 내가 이해하고 기다려야지.’      


에라이. 내가 평소 이런 마음가짐으로 살았다면 나는 진작 속세를 떠났어도 됐다. 왜 갑자기 착해빠진 생각을 했던 걸까. 지금 생각해보면 나는 두려웠던 것 같다. 경험 많고 나이 많고, 그러나 말은 안 통하는 임대인과 겨뤄 내가 원하는 대답을 얻어낼 자신이 없었던 거다. 지금 와서는 참 많이 후회하지만, 그때 나로서는 최선의 방어였다.      


그렇게 얌전히 기다리던 중 새 집의 계약날짜가 다가왔다. 부동산 중개업자의 중개 아래 새 집의 임대인과 전세계약서를 쓰는 날이었다. 잔금일(입주일)을 정하려면 임대인에게 전세 보증금을 반환받는 날을 확답받아야 했다. 부동산 중개업자는 나의 사정을 듣고 입주일을 미룰 것을 권유했다. 임대인에게 전세금을 마련할 말미를 주라며 애초 전세 계약 만료일(2월 10일)보다 일주일 정도 미룬 2월 16일에 입주하는 게 어떠냐고.     


나는 그 제안에 수락해버렸다. 그리고 임대인에게 ‘허락’을 받기 위해 전화를 걸었다. 돌이켜 보면 제일 바보 같은 짓이었다. 입주일은 왜 미루고, 허락은 왜 구했는가.     


전화를 걸어 임대인에게 상황 설명을 충분히 했다. 그러나 임대인은 내 말을 잘 못 알아들었다. 그리고 전세금 얘기를 꺼내자 심히 불쾌해했다. 여기서부터 나는 그 임대인을 ‘치(사람을 낮잡아 이르는 말)’라고 칭하겠다. 이때부터 그 치는 생을 살며 여기저기서 한 껏 갈아버린 송곳니를 드러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 이십구달팽이의 한마디. 계약금 받고 싶으면 일단 만원을 꺼내라

계약 만료에 따른 해지를 사전 고지했으면 세입자는 당당하게 전세보증금 반환을 요구해야 한다. 정확한 반환 날짜를 받아두고, 그렇지 않을 경우 내용증명을 보내 둬야 한다. 내용증명엔 1) 계약 해지 고지 2) 전세금 반환 요청 3) 기한 내 전세금 미반환 시 고소 의사 등을 기입해야 한다. 내용증명을 보내는 데는 1만 원가량 든다. 내용 증명 자체가 법적 효력을 가지진 못하지만 후에 고소 등 분쟁이 생기면 증거가 되고, 임대인에게 심리적 압박을 줄 수 있다. 보통 보증금이 소액일 경우엔 내용증명만 보내도 효과를 본다. 그러나 ‘그래도 배 째’ 식으로 나온다면 임차권 설정, 소송 등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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