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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삼십대 제철 일기 Mar 18. 2019

남의집살이-5

씹구 뜯기구 이십구달팽이


 

아홉수라는 게 있다고 했다. 숫자에 ‘9'가 들어간 때면 살(煞)이 끼여 특별히 조심해야 한다는 미신이다. 나는 미신을 적당히 믿는 편이다. 어찌 보면 ‘징크스’와 비슷한 개념이라고 생각한다.      


정을 빨리 주는 나는 마음에 드는 사람이 생기면 동네방네 그 사람을 애정하는 마음을 드러내고 다니는데, 입에 침이 마르게 그를 칭찬을 하다보면 갑자기 사이가 소원해지는 사건이 생기곤 한다. 그래서 난 누군가를 너무 급하게 좋아하지 않으려 애쓴다. 그전엔 우사인볼트 급으로 마음을 키워나갔다면, 지금은 깽깽이 발로 돌계단을 한 칸 한 칸 건너듯 조심스럽게 다가간다.      


미신이라는 게 과학적, 합리적 근거가 없는 걸 맹목적으로 믿는 일을 말한다.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한 사극 따위를 보면 백색 한복을 입고 머리를 정갈하게 묶은 여인이 보름달 아래서 물 한 사발 떠놓고 '비나이나 비나이다' 하는 것처럼. 문지방을 밟으면 운이 나가고, 다리를 떨면 복이 나가고, 까마귀가 울면 재수가 없고. 어떻게 전해 내려왔는지, 그래서 실제 미신대로 모든 결과가 귀결됐는지는 모를 일이다.     


그런데 사람 심리라는 게 ‘그래도 웬만하면….’ 이 된다.
하지 말라고, 피하라고 하는 짓은 피하게 된다, 께름칙하니까. 내겐 아홉수가 그렇다. 아홉이 든 수. 내가 딱 올해 스물아홉이 돼 버렸다. 만으로 스물아홉이어야 하는지, 한국 나이로 스물아홉이어야 하는지, 스물아홉 내내를 말하는 건지, 생일이 지나면서부터 아홉수 카운트가 시작되는 건지, 그런 건 모른다.      


그저 아홉수가 사나우니 중대사는 피하라는 게 우리 엄마의 당부였다. 엄마는 독실한 천주교 신자이면서도 미신을 꽤 믿으신다. 소가 이용하던 코뚜레를 지니고 있으면 돈이 들어온다더라, 장례식장에 다녀왔으면 집에 들어서기 전 몸에 소금을 뿌려야 한다, 베개를 밟고 있지 마라, 엄마의 미신은 참 다양하고 아기자기했지만 이를 받아들이는 엄마의 진지함이 더해져 나또한 공연히 믿게 된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다.     


미신은 맞아 떨어졌다. 스물아홉, 첫 시작부터가 참 거칠다. 임대인과의 기싸움-아니 일방적으로 질질 끌려다닌-와중에 나는 또 다른 암초를 만났다.      


어느 날 밤 자정 무렵, 집 앞에 덩그러니 놓인 편지 봉투. 나는 커다란 홍시 주스를 쥔 손이 너무 차가워 다른 쪽 손으로 바꿔들었다. 그게 왼손에서 오른손이었는지, 오른손에서 왼손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내 모든 신경은 편지 봉투로 향했다.       


‘임대인? 아니면 같은 층 세입자? 왜지? 시끄러웠나? 뭔가 실수한 적이 있나? 친구가 장난을 쳤나?’     


찰나의 순간 머릿속에 오만가지 생각이 스쳐갔다. 편지는 내 방문 앞에 놓여 있었고, 봉투 겉면엔 내 방 호수가 꽤 커다랗게 쓰여 있었다. 숫자는 단 세 자리였지만 글씨는 삐뚤빼뚤했다. 그 글자는 마치 "너한테 보낸 거 맞아. 나를 읽어, 어서." 라고 하는 양 내 방을 가리켰다. 어쨌든 누군가 의도적으로 나에게 쓴 편지가 확실했다.     


난 잔뜩 긴장한 채로 주위를 살폈다. 혹시라도 발신인이 근처에서 날 보고 있을까봐 겁났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짧은 복도를 걸어오고, 걷는 순서대로 짧은 복도의 센서등이 켜지고, 마침내 방문 앞에 서서, 편지를 발견해 두 눈 동그랗게 뜨고 편지를 집어 올리기까지. 그 모습을 누군가가 보고 있는 건 아닐까. 그러나 주위엔 아무도 없었다. 늦은 시각, 건물은 조용하고 습하고 차가웠다. 난 우선 편지를 가지고 집 안으로 들어가 모든 잠금장치를 빠르게 채웠다.      


사실 이 때까지만 해도 두려움의 정도가 약했다. 외국 스릴러 영화의 도입부처럼, 가벼운 차림을 한 주인공들이 클래식한 차를 몰고 한적한 시골길을 달리는 평화로운 느낌. 물론 그것이 전체 스토리 중에서 가장 별 일 없는 때이자, 다신 돌아갈 수 없는 한 때지만... 어쨌든 따뜻한 색들이 섞인 편지봉투 모양이 아기자기했고, 최근 업무가 바빠 집에 있는 시간이 적었기 때문에 딱히 다른 이에게 노여움을 살만한 실수를 하지도 않았다고 되새겼다. 임대인을 제외하곤 이 건물에서 알고 지내는 이가 없어 내용을 전혀 예상할 수도 없었다.      


난 일단 가방을 내리고 두꺼운 외투를 차례대로 벗은 뒤 홍시주스에 꽂힌 빨대를 쭈욱- 빨았다. 차가운 홍시 덩어리가 굵은 빨대를 타고 올라오다  막혀버렸다. 나는 빨대에 입김을 세게 불어넣으며 덩어리를 빼다가 잘 되지 않아 그대로 냉동실에 넣어버렸다. 홍시주스는 점점 신맛이 강하게 났다.      


일부러 무심한 척 편지봉투를 열었다. 

편지지는 한 장. 삐뚤빼뚤한 글씨가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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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씨가 제대로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편지지 한 장 가득 글자로 차 있었지만 나는 그 내용을 파악할 수 없었다. 두 번, 세 번, 네 번... 일곱 번이나 내용을 다시 읽었다. 글자는 마치 모스부호들 같았다.      


삑 삐빅 삐비비빅 삑-삑.     


여느 전쟁 영화에서 군인들이 모스 부호를 주고받던 장면이 떠올랐다. 그들만의 은밀하고 체계적인 암호. 하지만 이 편지는 수신인을 특정해 쓰였으나 발신인과 수신인과의 어떤 관계도 찾아보기 힘들었다.      


좁은 방 한 가운데서 편지 내용을 곱씹으며 갸우뚱 거리던 나는, 곧 소름이 돋았다. 뒷목에서부터 귀, 뺨, 코끝까지 소름이 오소소소 돋아났다.    

  

편지 내용을 함축해보면, 스토킹이다.


♣ 이십구달팽이의 한마디. 이웃이란

요즘은 바로 옆집에 살아도 서로 모르고 사는 게 태반이다. 혼자 사는 경우엔 적어도 본인의 층에 누가 살고 있는지는 알고 있는 편이 좋다. 계약할 때 집주인에게 이웃의 성별이나 연령층, 생활패턴 등을 물어보는 것도 도움이 된다. 이중잠금 장치도 필수다. 대표적인 게 현관문 안전고리다. 입주한 집에 없다면 집주인에게 동의를 구하고 본인이 직접 구매해서 설치하거나 설치기사를 통해 설치하도록 한다. 구매부터 설치까지 3만원 정도(지역이나 상품별 상이) 든다. 현관문 방범용 경보기도 있다. 창문이나 현관문틈에 부착할 수 있는 경보기로 밖에서 문을 열면 경보음이 울리는데, 인터넷에서 구매하면 가격이 3000원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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