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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삼십대 제철 일기 Jun 21. 2019

남의집살이-7

이십구달팽이에게 아가미를

'빚(debt)'은 극과 극이다.


그게 금전일 때는 숨이 턱 막히는데, 마음을 빚 질 때는 어쩐지 숨통이 트인다. 누군가에게 도움을 받는다는 건 참 불편하고 민망한 일이면서도 따뜻한 마음을 받았다는 느낌에, 없던 아가미가 생긴다. 다만 너무 많이 빚을 져 아가미가 벌어지다 못해 찢어지면 그땐 상처를 꿰매기 전까진 도무지 갚을 길이 없다. 빚을 지려거든 빠른 시일 내, 내 능력으로, 감당 가능한 수준이어야 한다.  


하지만 이번엔 그 허용범위를 훨씬 초과했다. 한두 명의 도움으로는 차마 수습하기 어려운 일들이었다. 전세금을 주지 않는 임대인부터 소름 끼치는 편지까지. 난 믿을만한 지인 여렷에게 상황을 털어놓고 조언을 구하거나 도움을 받았다. 선풍기를 틀고 그 앞에서 '아아아아-' 하며 입을 벌린 채 바람을 맞으면 오히려 숨쉬기가 힘들다. 여러 사람의 마음을 받으면서 내 아가미는 깊이 패여 속살이 드러날 지경이었다.


하루하루가 피로였다. 이 와중에 돌아가야 할 곳도 잃었다. 내게 집은 더 이상 안전한 곳이 아니었으니까. 그렇다고 이 편지를 들고 경찰서로 가자니 애매했다. 혹시라도 발신인의 심기를 건드릴까봐 겁났다. 이사까지 2~3주 정도밖에 안 남은 시점이기도 했다. 결국 나는 5천만원 짜리 집을 잠시 버리기로 하고 가까운 이들의 집에 얹혀살았다. 퇴근 후 함께 저녁을 먹고 잠자리를 같이 쓰는 정도의 아주 짧은 동거였는데, 그 짧은 시간 얼마나 많은 배려를 받았는지 모른다.

그럼에도 나는 잠자리가 바뀌고, 임대인의 전세금 문제에, 편지를 통해 느끼는 위협... 그리고 이 총체적 난국을 겪어내며 불면의 시간을 보냈다.


짐을 충분히 챙겨 나오지 못해 같은 옷을 계속 돌려 입으면서 두꺼운 겨울옷엔 여름철 메리야스에서 날법한 땀 냄새가 배었다. 혼자 생각할 여유가 없어 머릿속은 항상 뒤죽박죽 엉켜 있었다. 그렇게 일주일을 보내자 난 낡은 자루에 들어가 흠씬 매 맞은 사람처럼 온몸이 아프고 피로해 매사에 집중하지 못했다. 매끈했던 피부는 푸석하게 말라가고 트러블이 온 얼굴을 뒤덮었다.     


스트레스가 극에 달해 사리분별이 안 되던 시기였다. 난 결국 이사를 빨리 나가는 걸 택했다. 일단 이사를 나간 뒤 전세금을 나중에 받기로-이 선택은 나중에 굉장히 후회했다-했다. 문제는 이사를 하려면 다시 그 집에 들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파블로프의 개처럼 딸랑딸랑, 그 집을 떠올리면 두통과 복통이 왔다. 두려움과 불안함이 엄습했다. 하지만 별 수 있나. 이사는 가야 한다.


나는 열흘 만에 다시 그 집으로 들어갔다.


(가장 먼저 내게 아가미를 만들어준) 연인 L과 함께였다. 나를 걱정한 그는 살뜰히 나를 도왔다. 우리는 밝은 대낮에 움직였다. 발자국 소리를 죽여가며, 도둑질하러 온 침입자처럼 내 집에 들어갔다. 그리곤 좁은 방에서 날이 너무 추워 창문도 활짝 열지 못한 채, 케케한 먼지 속에서 대화도 없이 짐만 쌌다. 혹시나 편지의 발신인이 앙심을 품고 해코지를 할까 두려워 조금의 인기척도 삼갔다.


우리는 매 순간 긴장했다. L은 차량용 망치를 주머니에 넣고 다녔다. 호신용이었다. 평생을 살면서 흉기가 될만한 물건을 다른 이에게 휘두를 일이 있을까. 망치를 쥐고 있는 L의 모습이 너무 낯설어서 실소가 났다. 최악의 상황에서 우리를 지키기 위한 지푸라기였다. 편지의 발신인이 어떤 행동을 취할지 몰랐으니까.


짐을 싸는 내내 말을 아꼈다. 건조한 날씨에 앙다문 입술이 바싹 말라 이내 딱딱하게 굳었다. 어쩌다 말을 하기 위해 입을 열 때면 '쩍' 하고 입 떼는 소리가 날 정도였다. 나중엔 내 턱께에 달려 있는 게 입술인지 스템플러인지 헷갈렸다. 침묵의 시간이 이어질수록 우리를 둘러싼 공기가 차분히 가라앉았다. 진공 포장된 생닭이 된 마냥 갑갑하고 속살이 드러난 기분이었다. 난 자주 지쳐 부영하는 먼지를 손으로 휘감으며 멍하니 시간을 보내기 일쑤였고, L은 쉬지 않고 묵묵히 짐을 쌌다.


"이게 무슨 일이야, 미안해 L."


나는 이번 일을 겪으며 L에게도 지인들에게도 자주 이렇게 말했다. 이게 무슨 일이야. 그 시기 내겐 ‘어머나’ 혹은 ‘아니 이런!’ 정도의 추임새처럼 쓰였다. 그럴 때마다 L은 담담히 답했다.


"미안할 일이 아니야. 괜찮으니까 좀 쉬어."
"나 때문에 쉬지도 못하고...(쭈굴)"
"괜찮아."


L은 습관처럼 괜찮다는 말을 했다. 그 말이 우리를 싸고 있는 진공팩에 산소를 불어넣었다. 나는 L과 있으면서 안심하기 시작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안심한 만큼 L은 더 신경이 곤두섰다. 날 지켜야 한다는 책임감이나 신변의 위협이 그를 억눌렀는지 밖에서 나는 작은 소리에도 행동을 멈췄다. 아주 조용하고 조심스럽게 최소한으로 움직였다. 우리의 방문 밖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을지 모르니까. L은 때때로 집 밖의 동태를 살피기 위해 재빨리 문을 열어보거나, 문에 귀를 대고 밖에서 나는 소리에 집중했다.


사람은 얼마나 간사한 동물인가. 


L이 미어캣처럼 모든 외부 작용에 반응하는 걸 보며 마음 아파하면서도, 난 자꾸 안심이 돼 까무룩 잠까지 들었다. 방 안 곳곳에 널브러진 짐과 박스들 사이에서 새우처럼 몸을 구부려서도 꿀잠을 잤다. 얼마만의 단잠인지, 나는 아닌 척하면서도 스르르 드는 잠을 적극적으로 내쫓지 않았다. 문득 눈을 떴을 때도 L은 짐을 싸고 있었다. 그럴 때면 난 벌떡 일어나 분주한 척했다. 최대한 먼지를 풀풀 내서 미안한 마음을 가렸다.

우리의 주말은 그렇게 짐을 싸는데 통째로 썼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해가 떠 있을 때만 짐을 싸기로 했기 때문에 주어진 시간이 별로 없었다. 한바탕 짐 정리를 하고 집을 나설 때도 첩보영화 찍듯 살벌했다. L이 먼저 조심스럽게 문을 열어 사람이 없는 걸 확인한 뒤, 왼손에 차량용 망치를 들고 문을 나서면 내가 L 뒤에 숨어서 뒤따라 나왔다. 참 어처구니없고 억울한, 그렇지만 최선이었던 그 행동을 몇 번이나 반복했다.


주말엔 L과 함께 이삿짐을 싸고 평일엔 퇴근하면 지인들의 집을 전전해 살았다.


긴장과 불편함의 연속이었다. 


내 키보다 작은 독방에 누워 있다고 생각해보자. 세로 길이가 한 130cm쯤 되는 방 안에서 생활해야 한다면. (물론 사선으로 누워도 130cm가 안 넘는 크기여야 한다.) 앉아서 생활하는 것도 불과 몇 시간만 지나면 갑갑해질 거다. 두 발 뻗고 잘 수 없기 때문에 몸을 웅크려야 한다. 웅크려서라도 잠에 들긴 하겠지만 신체가 편치 못함에서 오는 스트레스는 결국 정신까지 지배하기 마련이다. 내 상황이 그랬다. 어디에서도 마음이 편치 않았다.


몸도 지쳐갔다. 손발을 비롯해 얼굴이 자주 부었다. 온몸이 건조해지고 얼굴엔 생전 안 나던 좁쌀여드름을 비롯해 여러 트러블이 생겼다. 작은 기척에도 깜짝깜짝 놀라고, 표정이나 행동이 어색해졌다. 마치 처음 무대에 선 신인 배우처럼 나의 모든 순간이 어색하고 극적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나를 더 슬프게 만든 건 L이었다. 든 사람 곁에 있으면 함께 시든다. 어느샌가 L이 아가미를 잃었다.


♣ 이십구달팽이의 한마디. 삶의 질을 높이는 포장이사

위 에피소드에서 포장이사를 하지 않은 이유는 곳곳에 도사리고 있는 위험에 혹시라도 포장이사 직원분들에게 피해를 줄까봐였다. 아울러 임대인에게 전세금을 받지 못한 상태라 포장이사를 예약하기도 애매했다. 이런 문제가 없는 이들이라면 포장이사를 추천한다. 특히 1인가구나 원룸 이사의 경우는 포장 이사 금액이 20만~30만원(거리, 이사짐에 따라 가격 상이) 정도다. 시간이 날 때마다 버릴 것만 버리고 따로 챙겨야할 물품이나 파손 위험이 있는 물품만 따로 챙겨놓으면 된다. 집 구하고 계약 마무리하기도 벅차기 때문에 이사짐 정도는 전문가의 손에 맡기자. 삶의 질이 높아진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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