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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삼십대 제철 일기 Jun 24. 2019

남의집살이-8

이십구달팽이를 '콕 콕 콕'

풍선에 바람을 불어넣고 입구를 잘 묶는다. 그다음 스카치테이프 한 조각을 떼어내 풍선 표면에 붙인다. 그다음엔 예리한 바늘로 . 팽팽하게 공기가 찬 풍선이라도, 테이프가 붙어있는 면을 찌르면 풍선은 터지지 않는다. 작은 바늘구멍으로 공기가 천천히 새어 나오다가 언젠가는 쪼그라들겠지만... 터지지 않기에 풍선은 잔해가 되어 바닥에 곤두박질치지 않고 둥둥 뜰 수 있다.


위로란 게 그렇다. 따듯한 말, 진심 어린 조언, 애정 어린 관심을 스카치테이프처럼 똑 똑 끊어서 붙여주면 바늘 하나쯤이야 쉽게 버틴다. 고달팠던 '남의집살이' 내내 나는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의지하며 자주 터지지 않도록 나를 지켰다. 때때로 온몸에 가시가 돋친 고슴도치 한 마리가 데굴데굴 굴러오는 때면 별 수 없이 팡- 하고 터지기도 했지만, 대체로는 쉬익 쉬익 바람 빠지는 정도로 그쳤다.


나와 L은 힘든 순간 서로에게 스카치테이프 조각을 붙여주는 사이다. 바늘을 막아주진 못해도 터지진 않게끔 정성껏.


“결국 다 잘 될 거야.”

L이 테이프 한 조각을 붙였다.

“이것도 다 지나갈 거야.”

 또 한 조각.

“앞으로 얼마나 좋은 일이 있으려고 이런 일이 생기겠어?”

한 조각 더.


L의 테이프는 결국 동이 났다. 연초부터 내가 맞은 바늘 세례를 L이 전부 감당하기엔 무리였다. L의 일상 곳곳에도 선인장이 있었으니까... 숨 가쁜 직장 생활에 몸 이곳저곳이 성치 않았던 L은 자주 한숨을 몰아 쉬었다. 쉬익 쉬익 바람이 빠져 한껏 쪼그라든 나는 뒤늦게 L의 상태를 파악했다. 그의 아가미가 바짝 말라있었다.


'이대로는 안 돼.'


나는 조금이라도 이 상황을 극복하고 싶었다. 그러려면 문제의 근원지인 '집'을 해결해야 했다. 일단 벗어나자.(최악의 상황에서 '일단'이라는 합리화가 얼마나 위험한 선택인지는 나중에 알게 됐다.) 결국 새로 이사 가는 집주인에게 양해를 구해 이사 날짜를 하루라도 앞당기자고 마음 먹었다.

이사 날짜는 2월 16일, 전세금 반환일은 2월 21일이었다. 이사를 앞당길 수 없다고 하면 일단 짐만 옮겨놓을 계획도 짰다. 하루라도 빨리 그 집을 나올 생각 뿐이었다.


어떤 식으로 이삿짐을 옮길 것인가에 대해 고민하고 있을 때, 친구가 난데없이 훅을 날렸다.


"너 전세금은 받았어?"


“아니. 21일 오후에 세입자 이사 들어오면 전세금 받아서 주겠대.”
“뭔 소리야. 그럼 돈도 못 받아놓고 짐을 뺀다고?”
“어?”


뒤통수, 아니 뺨 한 대를 세게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괜히 두 뺨이 얼얼했다.


이사에만 몰두를 하고 있다 보니 전세금 반환에 대한 경계심이 풀어졌다. 그 뱀 같은 임대인이 21일이 되면 또다시 스멀스멀 똬리를 틀고 내 돈을 휘감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당황한 내게 친구는 한 마디 더 얹었다.


“야 너 돈 많냐. 전세금을 받고 이사를 해야지.”


극심한 두통이 왔다. 편지를 받은 이후부터 모든 순서가 뒤죽박죽 엉켰다. 아니 따지고 보면 전세금을 제때 못 받아서... 뭐가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나는 한참 입을 열지 못했다. 머릿속에 뭔가를 잔뜩 욱여넣은 것 같아 더부룩해졌다. 내 오천만 원.... 이게 무슨 일이야!


고맙게도 내게 경종을 울려준 친구는 패닉에 빠진 내 상태를 확인하더니, 주섬주섬 스카치 테이프를 끊어 붙여주기 시작했다.


“그럴 수 있어.”

한 조각.

“나 같아도 그랬을 거야.”

또 한 조각.

“네가 지금 신경 쓸 게 좀 많니?”

한 조각 더.


테이프 몇 조각이 사방팔방 붙었다. 이제 바늘에 찔려도 좀 괜찮다. 할 수 있다. 나는 내게 바람을 잔뜩 불어넣었다.


'임대인에게 연락해보자.'


나는 2주 정도 만에 임대인에게 다시 연락해 보기로 했다. 전화로 하면 또 말이 바뀔 염려가 있었으므로 이번엔 문자를 쓰기로.

연락에 앞서 친구와 나는 전략을 짰다. 2월 21일에 전세금을 확실히 주겠다는 확답을 받는 게 목표였다. 계약서 상으로 나의 계약은 이미 2월 10일에 끝났으니 전세금 반환일이 더 미뤄져선 안 될 일이다. 심지어 21일은 평일(목요일)이었는데 임대인은 내게 오전에 짐을 빼라고 통보한 상황. 나는 21일 전세금이 입금된 후에 이사를 가기로 다짐했다.


후 하 후 하-. 심호흡 한 번.

문자를 보냈다.


(아직 문자의 내용을 보관하고 있으니 그걸 그대로 가져와보겠다.)


안녕하세요? 00호입니다. 다름 아니라 21일에 세입자분이 입주하신다고 들었는데, 몇 시에 이사하시는 건가요? 제가 직장 때문에 그날 오전에 짐 빼기가 어려워서요. 이날 퇴근 후에 이사를 해야 될 것 같습니다.


그때까지도 소심했던 나는 전세금을 받아야 이사를 가겠다고 직접적으로 말하진 못했다. 그래도 처음으로 그 치의 의사를 묻지 않고 나의 의사만 밝혔던 문자였다. 그동안은 호구처럼 ‘~해도 될까요?’, ‘그래도 될까요?’ 하며 당연한 내 권리를 그 사람에게 줘버렸다.


5분 뒤 답장 도착. 긴장되는 마음에 두 눈을 꼭 감고 한쪽 눈만 살짝 떴다. 뜬 눈이 파르르르 떨렸다. 곧장 내 얼굴이 새빨개졌다.


안녕하세요
걱정마시고짐을미리빼시고
청소나깨끗이하시고이사
오는즉시보내줄게요
전기 가스이사정산이나
오전에해놓으세요


띄어쓰기 없이 바싹 붙어있는 글씨들을 읽어 내려가며 나는 분노했다. 청소나? 정산이나??


전쟁이다 이젠.


♣ 이십구달팽이의 한마디. 전세금 받기 전 이사는 금물!

전세금을 돌려받기 전까지 방에 대한 우선 거주권은 세입자에게 있다. 아무리 집주인이라도 전세금을 돌려주기 전, 또는 이사에 대한 협의가 끝나기 전 새 세입자를 들이면 주거 침입이다. 그러니 절대로 전세금을 받기 전 짐을 빼서는 안 된다. 우리나라에선 계약 만료일까지 임대인이 전세금을 돌려주지 않아도 기간 내 강제로 받아낼 방법이 없다. 1)계약 만료 사전 고지 2)이사날 고지 및 협의 3)내용증명 발송 등을 통해 임대인에게 계약금 반환 약속을 받고 돈을 받은 뒤 이사하도록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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