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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삼십대 제철 일기 Nov 04. 2019

남의집살이-10

이십구달팽이가 달팽이집에서 나올 때

나는 좀처럼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전술이라는 건 따지고 보면 싸움의 기술이다. 태어나 한 번도 제대로 된 싸움을 해본 적 없는 내가-나보다 체급이 한 참 아래인 여자 형제와 투닥거린 것 외에는-뭘 얼마나 알겠는가.


고기도 먹어본 놈이 씹는다고, 좋은 게 좋은 거라고 허허실실 웃으며 살았던 나는 전술을 고민하다 말고 끼니때가 돌아오기도 전에 공연히 밥술이나 떴다.  


지인들에게 도움을 청하게 된 이유다. 불행한 소식은 꼭꼭 숨기고 싶었지만 한편으론 마음이 참 불안하고 외로워 오히려 더 알렸다. 도움이 있어야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일이기도 했기에. 난 염치 무릅쓰고 자주 조언을 구하거나 단도직입적으로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인간관계에 있어 최대한 ‘아쉬운 소리는 하지 말자’는 게 일종의 신조였는데, 와르르 무너졌다. 일단 살고 봐야 했다.


나는 열 명 정도의 지인들에게 나의 어려움을 털어놨다. 대화의 마무리쯤엔 지인들이 먼저 ‘나도 도와줄게’라고 조용히 마음을 건넸다. 그때마다 나는 얼떨떨해져서 스스로에게 답 없는 질문을 던지곤 했다.


난 운이 나쁜 거야, 좋은 거야?


든든한 지원군과 수많은 대화를 나눈 끝에 내린 결론은 다다익선. 도움을 줄 인원이 많으면 많을수록 서로 안심할 수 있겠다는 결론을 냈다. 아군은 많을수록 좋은 법.


좀 터프한 아군들은 “그래 봤자 남자 한 명 아니야? 나 혼자서도 충분히 도와줄 수 있어”(이 얘길 한 친구는 흥분했는지 자꾸 소매를 걷었는데, 손목이 아주 가늘어서 몰래 웃었다.), “넌 위험하니까 차에 숨어 있고 우리 둘이서 짐 나르지 뭐”, “짐 나르는 것 까지 해도 2~3명만 있으면 돼” 등등의 멘트를 날리기도 했다.


하지만 난 절대 터프할 수 없었다. 그때 나의 간이 아주 콩알만큼 작아져서 그렇기도 했지만, 어쨌든 나를 도우러 와준 사람들이 다치기라도 하면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다행히도) 나는 쪼렙이지만, 섭외력은 기가 막혔다.


내가 처한 상황에 대해 충분히 설명하고 고마움을 표하며 지인들을 하나 둘 모았다. 최종적으로 이사를 돕겠다고 나선 이들을 열 명 전부였다.


하지만 문제는 시간이었다. 이 중에서 이사 날짜가 맞는 사람은 동료 OL, 언니 C, 동생 Y, 친구 K 총 5명이었다. (앞서 나왔던 남자친구 L과 동료 L은 다른 인물이다.)


'고도의 전략이 필요해. 선택과 집중.'


우리는 중지를 모아야 했다. 지금 생각하면 참 대책 없고 우스꽝스러운 계획이지만... 일단 인원수대로 성능 좋은 목장갑과 검은색 마스크를 샀고 호신용 휴대용 봉 한 개를 주문했다. 차량용 휴대용 망치도 챙겼다.    


계획은 대충 이랬다.


1.  Y가 스타렉스를 렌트해 동선별로 나머지 인원을 한 명씩 태운다.

2. 도착하면 나와 C는 집주인을 만나 전세금 정산을 한다.

3. 나머지 Y, O, L, K는 5층 내 방으로 올라가 포장된 짐을 하나씩 가져온다.

4. 짐을 다 옮기면 모두 차에 타고 혹시 따라붙은 사람이 없는지 확인하고 빠져나온다.



참 간단한 계획이다. 하지만 조건이 많이 붙었다. 5층엔 L, K 중 한 명이 상주해서 상황을 살피기로 했다. 물론 그에게 차량용 휴대용 망치를 지니게 한다.(혹여 편지의 수신인과 마주하면서 피할 수 없는 몸싸움 또는 극악무도한 흉기가 등장했을 땐 휴대용 망치를 팔이나 다리 쪽에 휘두르기로 약속까지 했다.) 1층에선 l이 짐을 받아 차에 싣기로 했다. 편지를 받은 당사자인 나는 눈에 띄지 않기 위해 잠자코 1층에만 머무르기로 했다.


이만큼 시나리오를 짜기까지 얼마나 많은 이들과 수많은 시간을 보내며 머리를 쥐어짰는지 모른다. 시나리오는 완성됐다.


하지만 메가폰을 들기 전 할 일이 하나 남았다. (잠시 잊고 있던) 임대인과의 최 후 통 첩.


그 치가 전화를 걸어왔다.


내일 이사 언제 할 거예요?
그때 말씀드린 대로 오후 7시쯤이요.
정산할 건 해야죠. 전기세, 가스비 정산해놔요.
전세금은요?
아 안 떼먹어요.
(무응답)


당연히 줘야죠. 청소 잘하고 전기세, 가스비 정산 잘해놔요.


청소 못하고 죽은 귀신이 붙었나. 아님 신종 엿 먹이는 방법인가. 카세트테이프가 씹혀 똑같은 말이 번잡스럽게 재생되는 느낌이었다. 말을 내뱉는 내 목소리도 점점 차가워졌다.


내일 오면 전화해요.
네.
영수증 가져오고.
무슨 영수증이요?
아 전세금을 받았다는 영수증을 줘야지! 받아놓고 안 받았다고 하면 어떡해?


정말이지 지긋지긋했다. 졸렬했고 우악스러웠다. 우엑- 헛구역질이 날 정도였다.


이전에 계좌번호를 물어본 터라, 어차피 계좌이체를 하면 기록이 남는데 무슨 헛소리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걸 꼼꼼히 물어봤으면 좋았을 것을. 난 그냥 그 치가 확실히 하는 걸 좋아하나 보다 하고 넘어갔다.


전술을 세우며 바짝 독이 올라 있었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였다. 이미 기가 죽은 채로 시작한 싸움은 더 금방 지쳤다. 그 치는 영수증을 알아서 만들어오라고 했고 난 잘 알아듣지 못했음에도 알겠다고 했다.


최후통첩에서도 또 졌다. 또...


후회해도 소용없다. 이젠 물러설 데도 없다.


이삿날이 다가왔다.


♣ 이십구달팽이의 한마디. 전세금은 계좌이체다.

계약서상 전세금 반환 시 계좌이체로 돌려받을 것을 명시해라. 현물로 받을 경우 지폐 위조(굉장히 드물긴 하지만), 입금 제한 등으로 번거로워질 수 있다. 특히 수표로 받으면 타행 입금할 땐 하루 이상 걸리고, ATM기 입금이 제한될 수 있다. 수표가 아닌 현금으로 받을 때도 1인 ATM 입금액, 계좌이체 입금액 등에 제한이 있을 수 있다. 여러모로 계좌로 입금받는 편이 훨씬 깔끔하다. 세입자는 전세금이나 관리비 등을 임대인의 계좌로 입금하기 때문에 당연히 전세금을 계좌로 돌려받을 거라 생각하는데, 막상 전세금을 돌려줄 때 현금으로 주는 경우도 종종 있으니 계약할 때 이 부분을 꼭 명시하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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