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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삼십대 제철 일기 Jul 01. 2019

남의집살이-9

전투 준비하는 이십구달팽이 패거리

쨍그랑


부딪히면 깨지고, 깨지면 붙일 수 없다. 알알이 튄 파편 조각마저도 주워 담기 힘들다. 주워 담던 손가락이라도 베이면 어쩌나. 무언가가 깨지는 건 참 골치 아픈 일이다. 아무리 애를 써도 원래의 상태로 돌아갈 수 없다는 점에서 마음이 쓰라린 일이기도 하다. 내가 어떤 이와의 관계에서 부딪히는 걸 꺼리는 이유다.


나는 태어나길 천성이 모질지 못하다. 착하다기보다는 유순한 편이다. 수세미처럼 억센 사람이 있는가 하면, 강아지풀처럼 부드러운 사람이 있는 것처럼. 내가 후자 쪽이다.


본래 싸움에 흥미가 없었고 갈등이 생기면 주로 중재자 역할을 했다. 그러다 보면 나 같은 사람을 호구 잡는 이들이 종종 생기는데, 분하고 억울했지만 대체로 금방 훌훌 털어 넘겼다. 호구 잡는 이보다 호구 잡히는 내 주위에 더 좋은 사람이 많았기 때문에.(이건 참 행운이다 백 프로.)

그래도 가끔씩은 성질이 같은 사람이 부러웠다. 화내야 할 때 화르르 들끓어 화를 내고 사과를 받으면 푸쉬쉬 식어서 앙금을 털어내는, 그런 당찬 사람이 멋있다.


다행인 것은 연륜. 나이가 들수록 화를 내야 할 때 침착하게 비수를 꽂거나, 목소리를 높여야 할 때 침묵으로 분위기를 바꾸거나, 본때를 보여줘야 할 때 천천히 결과를 내놨다. 어찌 보면 다부지지 못한 내 성격에 대한 합리화이면서도, 쪼렙으로서 세상을 살아가는 스킬이기도 했다.


그런 내가 전투태세를 갖췄다.


그 치의 문자는 날 흥분시켰다. 고요한 나만의 호수에 파도가 쳐 성게들이 뭍으로 밀려나기 시작했다. 나는 그 문자를 또 보고, 또 보다가, 마침내 얼굴이 새빨개졌다.


한동안 분노에 휩싸였던 나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억지로 토닥거리며 답장을 썼다. (실제로는 문자를 4개로 나눠서 보냈다.)

청소나, 정산이나 해놓으라니요. 말씀 정말 너무 하시네요. 전세계약 만료일은 10일이었습니다. 전 계약 해지 고지도 사전에 했고, 그 과정에서 최대한 예의를 지키며 말씀드렸습니다. 계약 만료일에 집을 비우는 게 임차인의 의무이고, 임대인은 전세금을 돌려주셔야 합니다. 전 계약 만료일에 맞춰 새 집을 계약했음에도 전세금을 받지 못해 잔금을 치르지 못하고 일별 월세를 지불하고 있습니다. 임대인 분께서 전세금을 마련하지 못하셨다고 해서, 제가 직접 부동산 12군데에 집을 내놨습니다. 새로운 세입자도 제가 연락드린 부동산에서 연결됐습니다. 청소를 강조하셔서 주말에 일부러 미리 짐을 빼고 청소부터 했습니다. 이전부터 임대인께서는 전세금 얘길 하면 "확답 줄 수 없다, 기다려라"라고 하셨습니다. 확답을 받으려 하면 불쾌해 하셨구요. 임차인으로선 전세금을 받기 전에 짐을 빼는 게 당연히 불안하지 않겠습니까? 전 전세금을 늦게 주시는 것에 대해 불평한 적도 없고, '이사를 가야 하니 전세금을 언제 돌려주실 수 있느냐'고 여쭤봤습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까지, 저한테 부정적으로 나오시는지 모르겠습니다.


문자 내용을 그대로 가져와 봤는데, 다시 보니까... 나는 그때도 제대로 싸우지 못했다.

답답할 정도로 구구절절 예의를 갖춰 논리적으로 얘기했다. 물론 임대인에게 시종일관 나는 같은 태도였다.


전세금을 받지 못해 새로 계약한 집에 일별 월세를 지불하고 있으니 그걸 내놔라, 그게 아니면 하루라도 빨리 전세금을 돌려줘라, 청소는 계약 내용에 없으니 그만 좀 말해라, 전세금 반환에 대한 확답 주지 않으면 법대로 하겠다 등등... 강하게 내 의견을 요구했어야 했는데 나는 너무 범생이처럼 굴었다.


역시 그 치의 답장은 지저분했다.


그말은맞는데 나중에늦추어도
되겠냐해.서,그렇게하라했고
불안하면들어오면 집빼든지
하고전기수도는들어니오는
당연히정산해야지요
계약자한테전화해서몇시에
올건지확인하고연락할게요


난 분노에 차서 또다시 문자를 입력하고 있었다.

'나중에 늦추어도 되겠냐해.서,'  이 부분이 기가 막혔다.

임대인이 전세금을 못 준다 하니까 일단 이사 날짜를 미루기로 합의했던 일을 막무가내로 해석했다.


적당히 이성을 잃은 나는

다다다다다다다다다다다다다다다다- 문자 키를 두드렸다.

분노의 문자를 옮기기 직전, 문자가 왔다.


올사람이휴가내고온다며
저녁에 누가이사오느냐
하네요 전날저녁에가능한가요
보증금 이사들어오는데
안주는사람도있어요
이사전받아야 이사한다면
빌려볼게요


허무했다.


그 치에게서 '빌려볼게요'와 같은 같잖은 대답이 나오기까지 나는 얼마나 마음고생을 했던가.

나는 왜 진작 이런 문자 하나 보내지 못했던가.

늘 그랬듯 나는 나를 미워하고 나를 원망했다.


이 뒤의 문자는 대환장파티라 더는 적지 않기로 한다.

어쨌든 마무리는 계좌번호를 보내라고 했고, 나는 보냈다.


그 날,

나는 집에 가는 길에 몇 번이나 멈춰 섰다.


걷다가 우뚝 서기도 하고, 극심한 두통에 구역질이 나서 길가에 보이는 벤치를 찾아 앉아 쉬기도 했다.

멍하니 앉아 있던 내게 지나가는 사람들이 눈길을 던졌다.

마스카라를 한 속눈썹이 지나치게 무겁게 느껴졌다.

이대로 벤치에 스르르 누워 한숨 자고 싶을 정도로 피로감을 느꼈다.


내가 아주 작아져서, 민들레 홀씨 같은 머리카락을 지닌 아기처럼 작아져서,

누군가의 등에 폭 업힌 채 잠에 들고 싶었다.

하지만 짙은 피로에도 나는 집이 없었기에 아직 퇴근하지 않은 지인의 집으로 갔다.

텅 빈 방 안에서 밥값, 아니 방값을 하고자 집 청소를 한 뒤 대자로 누웠다가 모로 누웠다가 허리를 곧추 세웠다가 한참을 내 몸 가지고 씨름했다.


괜스레 코끝이 찡해졌는데, 음 그게 좀 애매했다.


'이게 울 일은 아니잖아?'


픽.


그렇게 생각하니 괜히 웃음이 나왔다.

어쨌든 그 치에게 전세금을 주겠다는 확답을 받은 셈.

더 나빠진 것도 없었다.


꼬르르륵-.


나의 긴 하루를, 어쩌면 끝나지 않을 여정을 단숨에 결론짓고 나니 배가 고파졌다.

저녁 9시를 넘긴 시간이었다. 나는 아주 배가 터지게 먹을 생각으로 배달음식을 양껏 주문했다.

물론 이날도 나는 잠을 쉽게 이루지 못했지만 나는 새벽 내내 주먹을 불끈 쥐었다.


전투 준비는 이제 시작이다.


전투의 기본은 전열 정비.

호구 잡히며 살았던 강아지풀 같은 인생이었을지라도, 난 들판에서 어우러져 살았다.

들녘에 있는 민들레, 벼, 갈대, 나무, 들개... 다 내 편이다.

함께 뛰놀며 아끼고 응원하는 내 편들을 한 데 모을 차례.


'날 도울 이들을 모으자.'


휴대폰을 꺼냈다.



대열 정비 시작.


♣ 이십구달팽이의 한마디. 전세금 못 받아서 이사를 못 간다고?

임대인에게 전세금을 제때 돌려받지 못해서 새 집으로의 이사가 힘들어졌다면, 그에 따른 손해 보상을 요청해야 한다. 물론 고소를 하고 손해 보상 청구를 하기까지는 시간과 비용이 걸린다. 우선 그 전에 임대인에게 전세금 미반환에 따른 손해 내역을 알리고 그에 따른 보상(일별 월세, 관리비, 전기 가스 사용료 등)을 요구하며 임대인을 압박해라. 눈 하나 깜짝 안 하는 경우도 있지만 심리적으로 압박을 받아서 '에이 빨리 줘버리자' 하는 경우(받는 입장에선 황당하지만)도 있다. 만약 그에 따른 손해가 클 경우엔 소송을 가늠해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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