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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삼십대 제철 일기 Apr 22. 2020

남의집살이-12

나쁜놈은 어디에나 있다

한 마디로 무대공포증 같은 거다. 무대에 올라 많은 이들의 시선이 모이면 머릿속이 하얘지고 벌벌 떨려 준비했던 모든게 꼬여버리는. 무대에 오르기 전에 수십 번씩 괜찮다 괜찮다 다독이지만 정작 무대에 오르고 나면 그 어떤 다독임도 효과가 없는. 


내가 '나쁜놈'을 만날 때면 겪는 증상과 비슷하다. 만나기 전부터 링 위에 올라 맞짱(?)을 뜨는 연습을 해도 실제로 링 위에 오르면 순간 아득해진다. 링 위에선 선수와 선수가 일정한 룰에 따라 겨룬다면 내가 링 밖에서 싸워야 할 이는 최소한의 룰도 모르는 나쁜놈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나쁜놈이란 (쌍욕을 섞지 않는 선에서) '상식 밖의 인간' 정도로 표현해보겠다.


난 그런 이들을 만나면 제대로 맞서 싸울 줄을 모른다. 한 번쯤 입에 거품을 물고 덤빌 법도 하지만 화가 날수록 조용히 할 말만 하는 나로서는 최대한 '적당한 선'에서 끝내버린다.


디데이. 임대인을 마주했을 때도 나는 그랬다.


그 치를 마주하자마자 분노가 치밀었음에도 굳은 표정으로 제대로 눈도 마주치지 않고 할 일만 했다. 실제로 주먹을 휘두르진 못해도 말로 한 방 날려줄법도 한데(혼자 화장실 거울을 상대 삼아 말싸움을 연습했다), 막상 그 치를 만나니 무대공포증이 온듯 눈 앞이 하얘졌다. 


'내가 무슨 수로, 어떻게 이 사람과 싸우지?'

'이미 다 끝난거나 다름 없지 않나?'

'지금이라도 왜 수표로 주냐고 따져야 하나?'

'그렇게 살지 말라고 한 마디라도...'


머릿속에서 각종 생각과 할 말들이 뒤섞여 진동하고 있는 와중에 임대인은 영수증을 적으라고 성화였다. 나는 이면지 한 장을 반으로 쭉 찢어 날짜와 받은 금액, 이름 등을 써내려갔다. 

2019년 2월 0일, 00빌 000 임대인으로부터 전세보증금 5천만원을 수령함. 이름 사인.

글씨를 휘갈겼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꼬장(?)이었다. 나도 참 나다.


그 치는 꿍시렁 꿍시렁 대면서 그 영수증을 받아들더니, 예상치 못한 한 방을 날렸다. 정말이지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본인 확인해야지, 신분증 갖고 왔지?
신분증은 왜요?
아, 본인이 맞는지 확인을 해야지. 돈을 아무한테나 주면 어떡해?
그럼 진작 말씀하셨어야죠. 
아니 당연히 가져와야지, 신분증을 안 가져오는 사람이 어딨어?


임대인.. 너도 참 너다.


나는 정말 입이 딱 벌어진다는게 이런거구나를 느꼈다.

사람이 뻔뻔해도 정도가 있...지 않구나. 그런건 없다. '내 말이 곧 법이요' 하고 사는 사람에게 상식이나 배려가 있겠는가. 


물론 신분증은 지니고 다니는게 일반적이지만 나는 그때 집도 없이 떠돌아 다닐때라 소지품을 잘 챙기지 못했다. 앞서 이야기에서 빠진 부분을 대략 설명하자면 이렇다.


연인 L과 이삿짐을 싸러 갔던 당시 우리는 짐을 전부 싼 다음에 절반의 짐만 지인 C(이사 어벤져스 멤버)의 집으로 옮겼다. 전세금을 돌려받지 못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짐을 싸고 옮기던 와중에 우려했던 일도 벌어졌다. 문제의 그 편지를 보냈던 수신인이 모습을 드러낸 것. 이 얘기도 에피소드로 담고 싶었지만 아직까지도 불안한 맘이 있어 건너 뛰었다. 그 남자는 이삿짐을 싸고 나르는 동안 내 방문을 두드리거나 1층 공동현관 앞에 서 있기도 했다. 위험한 상황이 발생할 수 있어 나는 차에 숨어있었고 L 혼자서 움직이느라 애를 썼었다. 


다행히 위험천만한 사건이 벌어지진 않았지만 살벌한 상황이었다. 고생 끝에 절반의 이삿짐을 옮긴 이후엔 C의 집에 얹혀 살았는데, 나의 짐이 모두 이삿짐 박스에 들어있어서 최소한의 옷만 꺼내 돌려 입었다. 한참 뒤에는 그 짐을 다시 새 집으로 옮겨야 했고, 새 집에서도 절반의 이사짐으로 살아야 했다. 새 집의 새로운 임대인에게 보증금에 대한 양해를 계속 구해야 했고, 보증금 납부 기한이 지날때마다 일별 월세를 치러야 했다. 


그런데 무슨 신분증이며 지갑이며.. 그런 소지품을 잘 챙기며 살았겠는가. 그리고 이런 상황이 만들어진 가장 큰 원인 아니 원흉이 임대인 아닌가. 그런데도 그 치가 신분증을 가져오지 않은 나를 나무라고 있는 꼴이라니.. 기가 찼다.


저는 보증금을 이렇게 수표로 받을 줄 몰랐잖아요.
아 영수증 쓴다고 했잖아?
그동안 계속 저랑 연락했었잖아요. 근데 본인 확인이 더 필요해요?
한 두푼도 아니고 본인 확인을 안 하고 돈을 어떻게 줘?


이쯤되면 그 치는 날 괴롭히는걸 즐긴게 아니었을까. 


난 다시 당황하기 시작했다. 그때 서류 처리 때문에 휴대폰 스캔 앱으로 신분증을 스캔해뒀던게 떠올랐다. 옆에서 그 상황을 보고 있던 C가 '모바일로 신분증 보내드려'라고 말했고 나도 체념한듯 그 치의 문자로 신분증을 보냈다.


절대...절대 이런 실수를 범하지 말자.

아직도 이때의 나를 용서할 수 없다. 아니.. 왜... 신분증을 왜 그 미친놈한테 보내 이 미친놈아!!!


신분증을 그냥 보여주면 될 것을 그 치의 문자로 보내버렸다. 그 어수선하고 닥달하는 분위기 속에서 나는 점점 판단이 흐려지고 있었던 것이다. 


(바로 신분증 재발급 신청을 하긴 했지만 거기에 내 주민등록번호는 고스란히 남아있을터다.)


그렇게

우여곡절 속에 어쨌든 모든 절차가 끝났고 그 치는 5천만원짜리 수표 한 장을 거넸다. 


장장 3개월의 전쟁 끝에...


나는 마침내 전세보증금을 받긴 받았다. 


♣ 이십구달팽이의 한마디. 원하는 바는 분명하게

너무 당연한 얘기지만 임차인이라면 캐치프레이즈처럼 떠올려야 할 문구다. 본인을 '을'이라고 낮추지 말고 '돈을 지불하고 대가를 취한 사람'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보증금을 내고 일정 기간 살기로 했다면 그 과정에서 생기는 문제에 대해선 그때 그때 고지해야 한다. 불리한 상황이 오면 증거를 남길 줄도 알아야 한다. <남의집살이> 에피소드만 돌아봐도 '이 때까지 보증금을 달라', '애초에 보증금을 계좌로 송금했으니 돌려줄때도 계좌이체해라', '계약 내용에 나와 있는 부분만 이행하겠다', '보증금을 미룬 대신 계약 만료일 이후의 전기세, 가스비는 내지 않겠다' 등의 얘기를 정확히 하고 증거를 남겨뒀더라면 상황이 (물론 임대인이 순순히 해주진 않았겠지만) 임대인에게 이리저리 끌려다니는 상황은 면했을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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