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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삼십대 제철 일기 Apr 28. 2020

남의집살이-13

 이십구달팽이, 완주(完走)란 무엇인가

42.195km 마라톤을 죽어라 뛰었다. 앞서 가던 사람이 발을 걸고 물웅덩이를 만들어 수없이 넘어지고 다쳤지만 결국은 일어나 뛰었다. 1등도 2등도 필요 없다. 완주를 목표로 뛰었다. 마침내 결승선을 통과하며 비오듯 쏟아지는 땀방울들이 입술을 적셔 겨우 쓰러지지 않고...완주의 짜릿함을 누리려는 그때 ! 갑자기 누군가가 오더니 결승선을 한참 뒤로 옮기는게 아닌가. 완주한 줄 알았던 마라토너는 영문도 모르고 다시 뛰기 시작한다.


나의 상황을 이 정도로 비유하면 될까.


장장 3개월에 걸쳐 임대인에게 전세보증금을 받았다. 그 와중에 얼마나 많은 일이 있었는가. 이사짐을 쪼개고, 지인의 집에 짐을 맡기고, 의문의 편지를 보낸 어느 남자를 피해다니고, 싸우고-사실 일방적으로 당하고, 울고, 위로받고, 일하고, 밤을 지새우고... 마침내는 전세보증금을 받아낸 것이다.


근데 문제는.. 하필이면 그 전세보증금을 수표로 받았다는 것.


임대인이 수표를 건넨 시간은 은행 영업시간이 끝난 저녁 7시쯤이었다. 그 수표는 A은행에서 발행한 수표였는데 인근에 A은행도 없었고 있었다 해도 영업시간이 끝나 입금이 어려웠다. 내 손엔 5천만원짜리 한 장이 있었고 바람이라도  불어 놓치면 일순간에 5천만원이 사라지게 되는 셈이었다.


불안했다. 


누가 5천만원을 들고 다니냐고..! 

얼른 통장에서 안전하게 보관하고 싶은 마음 뿐이었다.


나는 전세보증금을 받자마자 지인들에게 일단 은행 ATM에서 입금할 수 있는지 알아보겠노라 하고 나섰다. 이사짐은 지인들이 알아서 척척 나르고 있었다. 정말 고맙고 미안했지만.. 난 그 돈을 통장에 넣는게 급했다. 


겨울이었기에 외투에 안주머니가 있었는데 평소 쓰지도 않던 그 주머니가 그렇게 반가울수가 없었다. 안주머니를 발명한 사람에게 나지막히 찬사를 보내기까지 했다. 오 신이신여. (난 무교다) 안주머니에 5천만원을 넣고는 은행을 찾아 나섰다. 모든 신경이 나의 가슴께 달린 그 안주머니에 쏠리면서 가슴이 따끔 거리는 기분이었다. 


발걸음을 빨리 해 가까운 은행으로 뛰어갔다. 하지만 은행 ATM기 중에선 5천만원을 받는 기기는 없었다. (통상 은행 ATM기에서 수표를 받는 최대 한도가 1천만원이다.)


혼란스러웠다. 

물론 수표를 잘 챙기고 있으면 되지만.. 여간 불안한 게 아니었다.


하지만 별 수 없이 다시 돌아갔는데 이사짐이 거의 다 스타렉스 안에 실려 있었다. 편지를 보낸 남자를 마주칠까봐 나는 집에 들어가지 않기로 하고 C가 마무리를 하기로 했는데, 혹시나 해서 마지막으로 한 번 집에 들어가봤다.(아주 잽싸게)


스타렉스에 자리가 없어서 간이 책상이나 의자 등등은 모두 두고 왔다. 임대인에게 보관해달라고 '부탁'을 하는건 상상도 못할 일이었으니까. 게다가 선물받은 자전거까지 두고 왔는데 그건 Y가 공동 현관 근처에 숨겨 놨다가 나중에 따로 가져다 주기로 했다.


포기할 건 포기하고, 이사짐을 대충 확인한 뒤 우리 어벤져스는 짐으로 가득 찬 스타렉스에 몸을 구겨 넣었다.


자, 해산 !


이사 어벤져스는-그날 처음 본 사이도 있었지만-다닥다닥 낑겨 탔다. 


Y가 운전을 하고(Y는 정말 좁은 골목도 스타렉스로 잘도 빠져나갔는데 알고보니 운전병 출신이었다) C가 조수석에 탔다. 그리고 나, O, L이 뒷좌석에 옹기종기 앉았다. 이삿짐의 반절은 이미 새 집(새로 이사할 집을 편의상 새 집이라 부르겠다)에 옮겨 놨는데도 짐이 참 많았다. 얼마나 붙어 앉았냐면 한 사람이 기침을 하면 나란히 앉은 세 명의 몸이 흔들렸다. 그 상황이 웃겨서 서로 장난을 멈출 수가 없었다. 


참, 퇴근하고 오기로 한 K는 생각보다 도착이 늦어져서(나머지 사람들이 예정보다 일찍 퇴근했고 짐도 빨리 날랐기 때문) 와주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K는 막 출발하려다 발길을 돌렸다. 고마워 K!


지도 검색을 해보니 새 집까지는 차로 40분 정도 걸린다고 나왔다. 하지만 딱 퇴근 시간과 맞물리는 바람에 무지 막혔다. 꽉 막힌 차로 위에 뭉실뭉실 종이배가 되어 떠다니는 것처럼, 나는 축 젖어있었지만 이리 저리 부는 바람에 살랑살랑 흔들리기도 했다. 


지인들과 요즘 마카롱이 그렇게 맛있더라, 일만 안 하면 모든게 다 재밌다, 요즘은 다들 유튜브를 한다더라, 평생 직장이 어딨냐, 플랜B를 세워야 한다, 그래서 유튜브를... 이런 얘기들을 하며 웃고 떠들었다. 


퇴근하고 한창 피곤할 때 이삿짐까지 날라 지칠법도 한데 다들 어디 놀러가는 길인마냥 들떠 있었다.


그러면서도 '야, 너 진짜 수고했다', '진짜 고생많았어요', '장하다 장해!', '진짜 큰일 치렀네' 등의 얘기를 해줬다. 그때마다 나는 고개를 쳐들고 엄지손가락과 검지손가락으로 코를 꼬집으며 우는 시늉을 하기도 했다. 양팔을 교차시켜 셀프(?)로 내 팔을 끌어안으며 "나 자신 수고했어"하는 쇼맨쉽을 보이기도 했다. 그 모습을 본 지인들은 고개를 좌우로 젓거나 웃거나 장난치면서도 소리없이 날 응원해줬다. 


"이런 날 술 한잔 해야되는데"


누군가 말했다. 이날 모인 지인들은 술자리를 좋아하거나 주량이 세거나 어찌됐든 술을 매우 좋아했다. 그중에서도 술이 가장 땡기는(?) 사람은 아마 나였을 거다. 마침내 이사를 하고나면 축배를 들겠노라! 선언했던 나였다. 이삿짐을 모조리 옮기고 나서 다같이 술을 마실 계획도 있었다. 하지만 평일 저녁이기도 했거니와 아직 내 주머니에 5천만원이 있다는 점이 걸렸다. 


난 결국 이사를 모두 마친 뒤 다시 날을 잡아 파티를 열겠다고 약속했다. 대신 이날은 소소하게 치킨을 사기로 했다. 어차피 차도 막히고 저녁 식사 시간도 지난 참이어서 인근에서 저녁을 먹고 다시 이동하기로 했다. 


Y가 잘 아는 치킨집으로 향했다. 가볍게 맥주 한 잔씩만 시켜서 목부터 축이기로 했다.


다 함께 잔을 부딪히며


축하해
고생했어
잘했어
수고하셨어요


그리고


고마워요 다들


맥주잔 5개가 부딪히는 소리가 내 인생 2막을 알리는 신호탄 같았다. 짠이 아니라 땅!


이 뒤로는 그냥 정신없이 먹었다. 일단 두 마리를 시켰는데 다들 말수가 급격히 줄어들었다. 순식간에 두 마리를 클리어한 뒤 한 마리를 더 시킬 때쯤 다들 정신이 돌아온듯 했다.


"아 여기 치킨이 왜 이렇게 맛있냐?"


누군가가 진심으로 감탄하는 말에 다같이 깔깔대며 웃었다. 그 기분 그대로 밤새 놀고 싶었지만 난 치킨을 먹는 와중에도 왼쪽 손으론 끊임없이 안주머니를 확인하며 생각했다. 


'5천만원아.. 너 잘 있는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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