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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삼십대 제철 일기 May 24. 2020

남의집살이-15(완결)

이십구달팽이가 삼십달팽이가 됐어도

쨍하고 해뜰날 돌아온단다♬


트로트 '해뜰날'은 암울했던 1970년대 희망적인 메시지를 담은 노래로 가수 송대관씨를 스타 반열에 올린 곡이다. 1991년생인 나도 누군가 '쨍하고 해뜰날~' 하고 선창하면 '돌아온단다!' 하고 후창할 수 있을 정도로 귀에 익고 입에 익는 유명한 노래다. 


나는 이사를 끝내고 집에 드러누워 천장을 바라보다가 문득 떠오른 이 노래를 흥얼거렸다. 아주 구성지게. 하지만 내가 아는 가락이라곤 '쨍하고 해뜰날 돌아온단다' 한 가락 뿐... 뻐꾸기가 뻐꾹 뻐꾹 우는 것처럼 한 가락을 계속 반복해서 불르다보니 어쩐지 2%가 부족한 느낌이었다. 나는 가사를 검색해봤다. 


꿈을 안고 왔단다 내가 왔단다. 슬픔도 괴로움도 모두 모두 비켜라

안 되는 일 없단다 노력하면은~ 쨍! 하고 해 뜰 날 돌아온단다

뛰고 뛰고 뛰는 몸이라 괴로웁지만 힘겨운 나의 인생 구름 걷히고

산뜻하게 맑은 날 돌아온단다 쨍! 하고 해 뜰 날 돌아온단다!


가사를 한 번 읽어보고 신명나게 노래를 따라했다. 활기찬 가사의 노래를 따라부르니 괜스레 힘이 나 이사짐 정리를 시작했다. 옷걸이에 옷을 걸면서 엉덩이를 씰룩대기도 하고 식기를 정리하면서 멋대로 화음을 섞기도 했다. 

조금 더 어렸을 때는 사진 찍는걸 참 좋아했었다. 지금은 스타일도 관심사도 취미도 참 많이 바뀌었다ㅎㅎ


정말 내게 '해뜰날'이 온 것만 같았다. 


집이 그렇다. 맘 편히 쉴 수 있는 곳, 아무리 좋은 곳에 여행을 가도 돌아가 누웠을 때 '그래 이 맛이지' 할 수 있는 곳, 익숙하고 편안한 곳. 안락한 집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마음 컨디션을 활짝 개게 했다. 


손이 빠른 나는 하루 만에 이사짐을 대부분 정리하고 그날 아주 깊은 잠에 빠졌다. 




그 다음 날부터는 다시 평범한 일상이 시작됐다. 


어김없이 출근을 했고, 집 근처 마트에서 장을 봐서 밥을 해먹고, 어느 주말엔 가족을 초대해서 오붓한 시간을 보냈다. 부모님께선 여전히 나의 자취 라이프를 걱정하셨지만 그래도 이전에 살던 집보다는 '숨통이 트인다'고 한시름 놓으셨다. 


소소하게 뿌듯했던 건 집으로 놀러 온 친구들의 반응이었다. '집 참 잘 구했다', '나도 이런 방에서 자취하고 싶다' 등의 얘기를 들을 때면 어깨가 한껏 으쓱해지기도 했다. 


인테리어란 것도 해봤다. 5평짜리 집에 살 적엔 '최소한의 짐을 들여놓고 살도록 노력하는 것'이 유일한 인테리어였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짐도 늘어나는게 당연한 터라 항상 나의 인테리어는 실패했다. 현관문을 열고 세 발짝만 걸어도 마주보고 있는 침대와 책상에 도달하는 크기였으니... (흑)


당시엔 침대 끝에 행거가 있었는데 처음엔 아무것도 모르고 행거에 옷을 잔뜩 걸어놨다가 옷 먼지 때문에 난생 처음 기관지염에 걸리기도 했다. 물론 업무 스트레스나 면역력 저하 등의 원인도 있겠지만 당시 집에 놀러왔던 친한 언니가 방에 들어오자마자 심각한 표정으로 '옷을 들여놓을 방법은 없냐'고 물을 정도였으니 옷 먼지는 나만 모르고 지냈던듯 싶다. 


혹시 내 말이 기분 나쁘지 않았음 좋겠어. 옷을 옷장에 다 넣거나 안 입는 옷은 부모님 계신 집으로 보내는 게 어때? 네가 걱정돼서 그래. 


언니는 최대한 조심스럽게 말했다. 혹시나 내 상황을 비난하는 것처럼 들릴까봐 아주 상냥하게. 그러면서도 언니는 마지막 인사를 할 때 다시 한 번 '부탁'이라며 옷을 꺼내놓지 말라고 당부했다. 언니가 떠난 후에도 그 걱정스러운 말과 표정은 방 안에 남았다. 당시 나는 기관지염으로 응급실을 몇 번 오갔었는데 대부분의 옷을 정리하고 나서는 신기하게도 증상이 많이 나아졌다. 

당시 살았던 방의 모습. 아래엔 침대가 있었다. 행거 아래에 발이 오도록 누워 잤었다. 아주 좁은 방에 저렇게 옷을 잔뜩 걸어두니 옷먼지가 폴폴폴... 왜 그때는 그걸 몰랐을까


이사 온 9평짜리 집은 그런 걱정을 할 필요가 없었다. 전에 살던 곳보다 넓기도 넓었지만 수납 공간도 충분했다. 옷장만 3개에 책장이나 주방 수납장도 넉넉했다. 풀옵션 빌트인인 만큼 침대와 소파, 이동식 책장만 샀는데 기분이 내킬때마다 이렇게 저렇게 위치를 바꿔 분위기를 새롭게 하는 재미가 있었다. 원룸이지만 책장을 높게 쌓아 공간을 분리할 수도 있었고 훌라후프든 체조든 온 몸을 쫙쫙 뻗어 움직이는 것도 문제 없었다. 


전보다는 훨씬 '더 나은' 삶을 살게 됐다. 

평수가 4평 정도 넓어진 것 뿐인데... 


물론 이사한 집의 집주인과도 마냥 좋지는 않았다. 집 앞에 박스를 내놨다고 윽박지르거나 양해를 구했음에도 주차 문제로 언성을 높이기도 했다. 시간이 좀 지나서야 원래 말투나 대화법이 그렇다는 걸 알게 됐지만 여전히 마주하는건 불편하다. 


자취 7년차인 나는 이젠 집에 웬만한 문제가 생기지 않는 이상 절대 집주인에게 연락을 취하지 않는다. 정말 어쩔 수 없을 때만 얘기를 하고 나머지는 그냥 알아서 해결하거나 포기하는 편이다. 되도록이면 마주치지 않는게 상책. 만났을 때 건조하게 인사만 나누는 정도다.


남의집살이가 참 그렇다. 


이십대에서 삼십대가 되고 어느덧 직장인 6년차에 접어들었음에도 남의집살이는 도무지 연륜이 붙지 않는 느낌이다. 여전히 눈치가 보이고 하고 싶은 말을 속으로 삼킨다. 노심초사 불안한 때도 자주 생긴다. 애초에 지는 싸움인 것 같아 속상할 때도 많다. 


하지만, 

이쯤 되면 많이 싸워보지 않았나.


난 이제 같은 일이 생기지 않도록 행동할 줄 안다. 혹여 같은 일이 발생해도 전보다는 훨씬 더 목소리를 낼 줄 알게 됐다. 속이 시원하게 일갈하진 못해도 어버버-하지 않고 현명하게 대처하는 방법을 빨리 찾을 자신이 있다. 


주먹 불끈 !! 



나는 프로 남의집살이러.


더 씩씩하게 살겠다. 

내집살이를 하게 될 그날까지...!


아자 아자 화이팅!




p.s�남의집살이 16화는 '뒷 이야기'(후기) 입니다. 얘기가 더 남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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