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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삼십대 제철 일기 May 03. 2020

남의집살이-14

마라톤 완주-하자마자 다시 신발끈 맨 이십구달팽이

생선 잔가시 하나만 목에 걸려도 하루 종일 찜찜한 느낌을 저버릴 수가 없다. 통째로 씹어 먹어도 될 정도의 잔가시를 지닌 생선이었지만, 정말 운 나쁘게도 어느 작은 가시 하나만 목구멍에 딱 붙어버렸고, 하루 왼종일 그 가시 하나가 몸을 괴롭혔다. 여러 차례 맨밥을 넘기고, 뜨거운 차를 마시고, 꽁꽁 얼린 아이스크림을 삼켜도 좀처럼 잔가시가 빠지질 않는다. 잔가시를 토해내고 싶어 일부러 헛기침을 하다가 목이 쉬고 덤으로 두통까지 얻는다. 차라리 닭뼈라든가 커다란 알사탕이라면 옆사람에게 흉통이라도 누르게 했을텐데. 어쩔땐 너무 작아 더 성가실 때가 있다. 



그날 받은 수표가 내게 그랬다. 

어렵사리 받아낸 오천만원짜리 한 장이, 미처 넘기지 못한 채 목구멍에 쩍 달라붙어 있는 잔가시 같았다. 

치킨도, 맥주도, 아무리 꾸역꾸역 넘겨도 잔가시는 당최 넘어가질 않았다. 


티내지 않으려 했지만 나는 자주 수표가 있는 위치를 확인했다. 노상 안절부절 못했던거다. 이사를 마치고 개운하게 한 잔 하고, 그 다음부터는 술을 술술 들이켜 거나하게 취하는 게 내 계획(?) 중 하나였지만, 나는 끝까지 개운치 못했다. 


이런 내 상황을 눈치 챈 O는 대충 자리를 정리하고는 다함께 이삿짐 나르는 걸 돕자고 했다. 원래는 운전을 하는 Y와 하루 자고 갈 C만 내 방까지 짐을 올리는 걸 도와주기로 했었다. 하지만 생각보다 이삿짐이 많기도 하고, 이왕 시작한 김에 다 함께 새로 이사가는 집까지 가서 짐을 옮겨주겠다고 했다. 사양하기엔 너무나도 필요한 제안이었기에 눈 꼭 감고 또 한 번 부탁했다.(이 은혜는 꼭 갚으리라!) 배를 채운 우리는 다시 스타렉스에 올라타 새 집으로 향했다. 

내 수표... 잘 있니...(8년 전에 서울대공원에서 본 사막여우. 사막여우의 성격은 아주 예민하다고 한다.)


그때 시간이 밤 9시반 쯤이었다. 정체가 풀린 시간대라 스타렉스는 시원하게 달렸다. 새로운 집에 도착해서도 지인들은 신속하게 움직였다. 이웃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 최대한 대화 없이 빨리빨리 짐만 날랐다. 한 사람당 3~4번 정도 오르락 내리락 하니 짐을 모두 옮겼다. 


모두들 장갑을 벗어 내게 돌려주고는 손을 탈탈 털며 개운해했다. 밤 11시쯤이었다. 다들 서둘러 지하철역을 찾으며 집까지의 거리를 계산하고 있는데, Y가 모든 멤버들을 집 앞까지 태워다 주겠다고 했다. 스타렉스는 24시간 대여 신청을 해놨기 때문에 다음 날 저녁까지 이용할 수 있었다. 다들 뿔뿔이 흩어져 사는데도 Y는 한 명씩 집에 데려다주고는 돌아갔다. 그리곤 다음날 전에 살던 집에 놓고 왔던 자전거까지 실어다 주고는 스타렉스를 반납했다. 의리가 으리으리한 Y였다. 


어벤져스 멤버들은 그 날 밤 '잘 도착했다', '고생 많았다' 등등 문자와 전화를 남기며 끝까지 내 마음을 채웠다. 모든 멤버의 무사 귀가를 확인한 뒤 나와 C는 이삿짐을 대충 한 곳에 밀어놓고는 서둘러 씻고 잠을 청했다. 


정말 오랜만에 내 집에서, 발 뻗고, 맘 편히 잠을 자...야 되는데 5천만원 생각이 났다.


아직 새 집에 보증금 완납이 안 된 상태니까...



하 지 만



내일 일은 내일 생각해도 된다.

이제 집이 있으니까! 


아주 오랜만에 꿀잠을 잤다.


복잡미묘한 꿈을 여러번 꿨지만 눈을 떴을 때 내 시야에 들어온 공간을 보자마자 마음이 뻥 뚫렸다. 5평에서 9평(정확히는 8.5평 정도). 그 차이는 실로 어마어마했다. 


물론 50평에 살던 이가 9평에 살게 되면 움직일 때마다 여기저기 부딪히며 발꼬락을 잔뜩 오무린 채 다녀야 할 수 있겠지만, 5평에 살던 나는 9평짜리 방이 그렇게 시원할 수가 없었다. 먼저 일어난 나는 창문을 활짝 열고 블라인드를 걷어 햇살이 들어오게 했다. 그러자 C가 부스스한 모습으로 일어났다. 

볕이 참 좋군...


언니 이거봐봐. 여기서 운동도 할 수 있다?


나는 양팔을 좌우로 쫙 뻗은 후 이리 저리 움직이며 말했다. 그 모습에 C가 픽 웃으며 말했다.


방이 넓게 빠졌네.
딱 봤을 땐 9평도 넘어 보이지 않아?
응 원룸 치곤 크네.
맘에 들어.


C는 나와 함께 방을 데굴데굴 굴러줬다. 그리곤 주섬 주섬 출근할 준비를 했다. C의 직장이 우리 집과 가깝다며 '종종 이용하겠다'는 말을 남긴 채 집을 나섰다.(실제로 그 뒤로 C는 종종 우리 집에서 잤다)


나는 C를 배웅해준 뒤 서둘러 준비를 했다. 


드디어 5천만원을 입금할 차례..!


이날 아침, 창문을 열고 블라인드를 걷고 C에게 방이 넓다고 자랑하기 그 훨씬 전. 난 눈을 뜨자마자 전날 입은 외투의 안주머니부터 확인했다. 5천만원은 (당연히) 얌전히 거기 있었다. 


수표는 A은행에서 발행한거라 A은행으로 가야 당일 입금이 된다. 하지만 집에서 A은행이 멀기도 하고 그쪽에 계좌가 없어서 좀 번거로울 것 같았다. 고민 끝에 나는 주거래은행인 B은행으로 향했다. 집에서 걸어서 15분쯤 걸리는 거리였는데 얼마나 잽싸게 갔는지 10분도 채 안 돼서 도착했다. 모든 신경이 안주머니에 향한 채로.


무슨 일로 오셨어요?
(속닥속닥)수표 입금하려고요.
네? 


은행에 도착해서도 나는 내가 5천만원짜리 수표 한 장을 갖고 있다는 걸 속삭이듯 말했다. 지금도 그 때 생각만 하면 나 자신을 놀려주고 싶을 지경이다. 으휴 이 쪼렙아.


근데 문제는 A은행 수표를 B은행에서 입금할 때는 하루가 지나야 한다는 점. 집주인에게 양해를 구하고 전세보증금(잔금)을 입금하기 전까지 일별 월세를 지급하기로 한 상태긴 하지만 보증금 지급이 하루 미뤄지는 점에 대해서 다시 양해를 구했다. 집주인은 좀 심드렁해 했지만 '알겠다'고 했다. 


5천만원 중 3500만원은 잔금으로 보내고 1500만원은 기존 전세보증금 미반환 사태를 해결할 때 썼던 '엄마 찬스'를 갚는데 썼다. (엄마께 빌린 돈은 이보다 더 있었는데 그건 두 달쯤 걸려 모두 갚았다!)

 

나는 은행에서 입금 영수증을 받아 사진으로 찍은 뒤 집주인에게 문자를 전송했다. 


'잔금 3500만원 수표로 입금했습니다'


그리고는 아주 상쾌한 발걸음으로 은행을 나섰다. 


아 개운해. (물론 쪼렙은 내일 집주인 계좌로 보증금이 잘 들어갈까, 문제가 생기진 않겠지 등의 걱정을 조금씩 하긴 했다)


마라톤은 이렇게 일단락되는 듯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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