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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삼십대 제철 일기 Jun 08. 2024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돈을 벌 수 있을까?(상)

피아노 학원에서 내가 한 일이라곤..

나는 여덟 살 즈음에 '내가 강력히 원해서' 피아노 학원을 다녔다. 이렇게 말하면 '혹시 피아노 신동?'이라는 생각이 들 수 있겠지만... nope! 이유는 심플했다. 두 살 터울의 친언니가 피아노 학원을 다녔기 때문이다! 나는 시간이 되면 피아노 학원 봉고차를 타고 휙 떠나는 언니에게 서운했다.


언니는 마치 다른 차원의 동화 같은 세상으로 여행을 떠나는 것만 같았고, 덩그러니 남은 나는 언니 없는 재미없는 세상에 머물러야 했다. 그게 얼마나 외롭게 느껴졌는지 모른다. 당시 우리 집은 피아노는커녕 건반 76개짜리 전자 키보드도 없을 때였다.


피아노를 어떻게 치는 건지도, 피아노 소리가 얼마나 심장을 두드리는지도 몰랐다. '그냥 언니가 하니까'가 인생의 모토였던 여덟 살짜리 꼬마는 엄마를 졸라 계획보다 일찍 피아노 학원에 가게 됐다. 아마 엄마는 언니를 피아노 학원에 보내기 시작한 아홉 살 정도가 됐을 때나 나를 학원에 데려갔을 터.


어린아이의 귀여운 인생의 모토가
집안의 당연한 수순을 깨트리던 순간이었다!


하지만 피아노 학원은 예상과 달랐다.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친구와 나란히 피아노 앞에 앉아 사이좋게 건반을 칠 줄 알았지만, 학원은 학원이었다. 선생님의 통솔 하에 학생들은 피아노가 아닌 책상 앞에 바르게 앉아 이론 공부를 먼저 해야만 피아노를 칠 수 있었다.


소심하고 내성적이었던 나는 잔뜩 긴장을 하면서 재미를 느낄 새가 없었다. 그럼에도 내가 지금까지 피아노를 즐겨 칠 수 있는 건 '개인 연습실' 때문이 아닐까 싶다. 피아노를 치게 되면서는 개인 연습실에 들어가 선생님과 나란히 앉아 악보에 맞게 피아노 치는 법을 배웠는데, 어느 정도 악보를 볼 줄 알게 되면 스스로 연습할 시간을 가졌다.


선생님은 동그라미 열 개가 줄줄이 그려져 있는 카드를 주셨다. 한 번 칠 때마다 동그라미에 연필로 빗금을 그어, 열 번을 다 그을 때까지 연습을 해야 했다. 처음엔 빗금을 긋는 게 재밌고 뿌듯해서 열심히 열 번을 채웠지만, 여덟 살의 집중력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고 나는 오롯이 혼자 쓰는 그 공간을 사랑했다.


그때 나는 내 방이 따로 없었다. 혼자만의 공간을 갖고 싶다는 생각을 해 본 적 없었는데, 처음 가져 보는 나 혼자만의 공간은 아늑하고 평화로웠다. 선생님이 문을 나서는 순간 방의 공기가 달라졌다. 마치 해를 다스리는 요정이 내 방에만 햇살이 흩뿌려진 봄을 넣어주는 것만 같았다.


나는 그 시간을 즐기기 위해 피아노 한 곡을 상당히 빨리 열 번 쳤다. 빨리 치고 남는 시간에 놀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걸 금방 알아챈 선생님께 혼이 나고선 '교묘한 전략'을 생각해 냈다. 여덟 번 정도만 쳐놓고 동그라미 열 개 모두에 빗금을 그어놓는 방법! 혹시라도 선생님이 횟수를 셀까 봐 조마조마했지만 다행히 걸리지 않았다.


특별할 거 없이 흘려보내는 시간이 꽤 재밌었다. 그저 멍 때리고 있기도 하고, 배우지 않은 곡을 미리 쳐보기도 했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좋았던 건 시를 쓰는 일이었다. 나는 소곡집 맨 앞 장에다 시를 지어 썼다. 그날의 날씨나 기분이나 재밌는 에피소드를 떠올리며 시를 지었다. 시를 노랫말 삼아 음정을 붙여 내 멋대로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선생님의 기척이 느껴지면 얼른 다시 악보를 펴고 피아노를 쳤다. 두근두근. 짜릿함 때문인지 피아노 울리는 소리 때문인지 심장이 빠르게 뛰곤 했다. 그 시간은 내 생애 첫 일탈이자 아주 자연스럽고 사랑스러운 창작의 순간들이었다.


아직도 소장 중인 피아노 소곡집. 맨 앞장에서 엿보는 어린 나의 일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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