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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안 Dec 19. 2024

남편과 아버지를 태운 말은 애도하듯이 숲길을 걸었다.

할 말을 절제하여 침묵한다는 것은 고통스러운 순간을 대면하게 만든다.

너네. 서울로 좀 올라와야겠다.

아버지가 요즘 더 건강이 안좋다.

시어머니 전화내용은 짧고 무거웠다.


시아버지는 80대 어르신이라고는 믿기지 않을정도로

건강하고 정정한 분이었다.

어머니는 그런 양반이 요즘 가끔씩

기억력이 흐려지고 기력이 많이 떨어지셨다고 했다.


사실 그 해 구정 명절때

아버지는 차롓상 앞에서 차례를 지낼 

우리 큰 애 이름을 남편 누나인 큰 고모 이름으부르시며 착각하셨다.

아주 찰라여서 실수를 하신건가.

그땐 그렇게 생각했었다.


급하게 비행기표를 예약하고 서울로 올라갔다.

병원에 입원한 아버지 기억은 종종 혼재되어

엉뚱한 말씀을 하시다가도

언제 그랬냐는듯이 또 괜찮아졌다.

다행히 검사결과 치매는 아니었고

다른 질병에서 오는 증상들이었다.


아버지는 병상에 누워계시다가

아들 손을 잡고 쓰다듬으시더니

조용히 말씀하셨다.

ㅇㅇ이 손이 많이 거칠어졌네.

이젠 노동하는 사람 손이 다 되었구나.

내가 얼른 몸이 좋아져서

너희 마장에도 한번 가봐야 할텐데.


남편은 그렇게 말했다.

아버지. 얼른 회복하셔서 우리 마장에서

저희 사는 것도 보시고 말도 타보시고 해야죠.


우리 삶이 얼마나 치열하고

거친 삶을 살고 있는지

남편이 아버지께 구구절절 말씀드리지 않아도

아버지는 아들 손을 부드럽게 잡아보시기만 해도 느끼셨다.

곱고 부드럽던 아들 손바닥에

굳은 살이 박히고 투박하게 거칠어졌음을.


아버지의 건강상태는 급격하게 나빠졌다.

무기력해지셨고 하루종일 주무시는 시간이 많아졌다.


어머니는 아버지 간병을 혼자서 돌보셨는데

아버지의 상태가 점점 나빠지자

종종 간병인의 도움을 받긴 했으나

어머니는 아버지의 간병을 도맡아하셨다.

간병인을 쓰는것도 불편해 하셨고

요양 병원은 입밖에 꺼내지도 못하게 하셨다.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까지 당신이 집에서 돌보시겠노라.하셨다.


어머니가 아버지를 돌보시느라 지쳐갈수록

전화너머로 들려오는 어머니의 목소리는

점점 날이 서있었다.

당신이 얼마나 지금 힘든지

아버지때문에 얼마나 걱정이 되는지

우리에게 늘 하소연 하셨다.


그런 전화를 받을 때마다 바다건너에 사는

남편과 나는 늘 안절부절했다.

남편은 착한 아들이었고

나는 할 말을 아끼며 지내는 며느리였기 때문이다.

멀리 떨어져 지낸다는 이유로

자주 찾아뵐수 없으니

어머니에게 우리는 항상 무심한 아들내외였다.


우리에게 인생이 시작되었을 때

시댁뿐만 아니라 친정에서는

남편과 나, 우리 둘이 지들 좋아서

저 일을 한다.생각했다.


어찌보면 당연하다.

나는 시댁뿐아니라 친정에서도

처지를 장황하게 어놓으며

평소에도 좋네.싫네,

하소연하는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말과 함께 사는 인생.

그것은 남편이 살아보고 싶어하던 삶이었다.

일방적으로 남편이 시작한 일이었고

나는 남편에게 코가 낀 옴짝달싹 못했다.


그 삶은 흙먼지 바람이는 벌판에서 서서

잠시도 쉴틈없이 온 몸을 움직여

노동하는 삶이었다.

365일 24시간 감옥에 갖힌 죄수마냥

마장에 매어지내는 삶이었다.


나는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매일 나를 몰아대서

눈 팔 어깨 허리

내 몸은 어디 한군데 성한 구석이 없었고

불안정한 심리 상태 역시 말이 아니었다.


남편이 원했던 말과 함께 사는 삶이라는 것은,

말들이 우리에게 주는 행복감

빛처럼 짧게 우릴 스쳐 지나갔

지독히도 힘든 날들은 길고도 길게 이어졌다.

찰라같은 기쁨뒤에 괴롭고 고통스러운 시간들이 따랐다.


남편은 마장을 꾸려가느라 정신이 없었고

나는 남편 마장에 필요한 자격증을 딴 답시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꼼짝 못하고

학교에 매어있어야 했다.

학교 생활은 20대 청춘때의 즐거운 대학생활이 아니었다.


시댁에서는

오십이 다 된 내가 말이 좋아서

말에 미쳐 신나게 말을 타며

대학을 다니고 있거니 생각했다.

내가 얼마나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지

아무에게도 내색하지않았기에

그들이 모르는게 당연했다.


좋은 이야기는 당장 전화로

 시간이고 수다를 떨 지언정

우리가 힘들고 어려울 때는

결코 내색을 해본적이 없었다.


우리가 너무 힘든 상태였기에

우리는 양가 부모님들이 걱정하실까말을봐

오히려 말을 아꼈다.

우리가 그렇게 말을 아낀 여파는

크고 깊게 우리에게 다시 되돌아왔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불안정한 상태를

당신 역시 극도로 불안해 하셨고

편치 않는 몸으로 당신 혼자

간병하시는 고충을 토로했다.

나는 그런 어머니를 이해하면서도

내가 사는 처지도 처지인지라

어머니와 통화때마다 마음이 힘들었다.


어머니와 통화가 시작될 때,

여보세요.라는 첫마디에서

어머니의 오늘 감정상태가 어떤지

내가 알아차릴 정도로 어머니 목소리에는

항상 감정이 실려 있었다.


어머니와 이렇게 통화를 하는 날에는

어머니가 직설화법으로 쏟아내는 거친 말씀들을

나는 말을 삼키고 감정을 누르며

몸으로 받아내었다.


나는 갈등 관계에 놓이는 걸 굉장히 싫어한다.

천성적으로 그렇다.

이런 일이 벌어지는 날에는

내가 말을 절제하고 감정을 감추는 만큼

묵직한 불안감이 내면 깊은 곳에서

스프링처럼 튀어 올라왔다.

잠시 잠잠하던 공황증세가 다시 시작되었다.


말과 함께 사는 삶살기위해

우리가 얼마나 사투를 벌이고 있는지,

지난 시간

가족들에게 철저하게 말을 아끼며 지낸걸

나는 정말이지 후회한다.


지금은 그렇게 생각한다.

그로인해 쌓인 오해가 너무 깊었고

어머니는 어머니대로 나는 나대로

깊은 마음의 상처를 얻었기 때문이다.


남편이 서울 올라가는 횟수는 점점 잦아졌고

나도 최대한 시간을 내서 서울로 올라갔다.

몇주에 한번씩 서울로 올라가던 횟수가

일주일에 한번,

며칠에 한번씩 점차 잦아들  

아버지 상태가 위중해졌다.


남편이 먼저 서울로 올라갔고

나도 바로 뒤따라 올라갔다.

내가 서울로 올라가던 날도 역시나

망할놈의 지도자 자격증 시험 일주일 전이었다.


학교에서 망할놈의 말똥 삽질을 하고

마장에서 망할놈의 연습을 한 후에 서울로 갔다.

무엇이 선이고 후인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 처한 나는

내 생활에 깊은 회의감이 들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날 새벽에

나는 아버지 곁을 혼자 지키며 앉아 있다가

거칠게 호흡하며 누워 계신 아버지를 껴안고 펑펑 울었다.


바다 건너 멀리 떨어져 말들 키우고 사느라

자주 찾아뵙지 못한 것이 죄송했다.

아버지 상태가 지경인데

우리는 우리대로 기를 쓰며 살아보겠다고

아둥바둥하며 지낸 시간들을 생각하니

설움이 복받혔다.


나는 아버지를 안고 울면서 조용히 말했다.

아버지는 제 맘 아시죠?

제가 아버지를 얼마나 사랑하는지요.


아버지는 손주들 얼굴까지 다 보시고 난 후

다음 날 편안하게 돌아가셨다.

아버지 장례를 치루느라 정신이 없는 와중이었다.

친정엄마를 모시고 큰 오빠와 작은 오빠 내외가 문상을 왔다.


친정 식구들이 테이블에 앉자

어머니가 다가와 인사하셨다.

어머니는 친정 식구들이 모여앉은 자리에 앉자마자

그동안 참아온 말을 내뱉듯이

친정 엄마에게 말씀하셨다.


또리 애미가 시아버지가 병중일 

자주 찾아오지도 않았고

전화도 자주 하지 않았다고.

무심한 며느리라고.

당신이 그동안 내게 서운해 하셨던 말씀들을

친정 식구들이 다 모인 자리에서

주저하지 않고 하셨다.

아버지 장례식에 문상을 온 친정 식구들 앞이었다.


나는 그동안 어머니에게 서운한 말들이나

억울한 말을 들어도

어머니. 그게 아니라요. 하면서 명하거나

내 처지를 설명하지 않았다.

나를 방어하거나 해명하거나

이해시킬 말들은 많았지만

당장 갈등상황이 예상되는 일일수록 그러했다.


나는 갈등이 생길 때,

스파크가 튀는 즉각적인 해결보다는

느리지만 자연스러운 문제 해결법을 선택했다.

늘 그랬다.

그게 내가 인생을 사는 방법이었다.


나의 진심과 당시 나의 처지는

시간이 무르익으면 자연스레 드러났다.

어머니는 종종 뒤늦게 사정을 이해하고는

나를 오해했던 걸 미안해하시곤 했다.


그러나 그날은 정말이지

어머니 말씀이 너무 서운했다.

아버지 문상을 온 친정 엄마에게

꼭 그자리에서 그런 말씀을 하셔야 했던 걸까.


친정 엄마는 내가 이야기 하지 않아도

중년에 들어선 우리가

생뚱맞게 이런 생소한 삶을 살고 있는것을

늘 속상해 하셨다.

동물을 키운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것인지,

체력도 약한 내가 매번 말에서 떨어지며

오기를 부리며 말을 타고 있는것을

항상 걱정하셨다.


비가 오면 비가 와서 우리를 걱정했고

폭염이 기승을 부릴땐 폭염이 온대로

태풍이 오면 태풍이 온대로

폭설이 내린다 기상예보를 보면 본대로

날선 바람이 부는 벌판에서

말들을 돌보며 일하는 우리를 걱정했다.


내가 아버지 걱정을 할 때도

엄마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내 처지가 딱해 어쩔줄 몰라하셨다.

어머니가 나에게 서운해하고 있다는 것도

엄마는 잘 알고 계셨다.

그래도 니가 어쨌든 시간을 내서

자주 서울에도 가고

전화도 자주 드려라.

부모 마음은 다 그런거야.했었다.


아버지 문상을 온 친정 엄마와 오빠들 내외는

생각지도 못한 어머니 말씀에 말을 잃었다.

사돈 어른 문상을 왔다가

당신 딸이 무심한 며느리라는 소릴

듣게 으니 나는 친정 엄마에게도

오빠들 내외에게도 부끄러워 얼굴을 들지 못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남편은 그자리에 있질 않았다.


어머니가 친정 엄마에게 그런 말을 하실 

우리 큰 애가 같은 자리에 앉아 있다가

속상한 표정으 나를 한번 쳐다보더니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큰 애도 내가 얼마나 기를 쓰며 살고 있는지 알기에

외갓집 식구들 앞에서 할머니가 하신 말을

굉장히 듣기 힘들어했고 괴로워했다.


문상 온 친정 식구들이 돌아가자마자

너무나도 속상했던 나는

아버님 영정 앞에 앉아서 소릴내어 엉엉 울었다.

내 울음소리가 컸던지

아버님 영정앞에 앉아

큰 소리로 울고 있는 나를

시댁 식구들이 한번씩 들여다봤다.


큰 애가 다가와 내 곁에 조용히 앉더니

내 어깨를 감싸며 토닥이며 말했다.

우리 큰 애만큼은 알고 있었다.

아버지 영정 앞에서 소리내어 우는

그날 나의 울음이 어떤 의미인지를.


엄마.

오늘 할머니 말씀은 하실 말씀이 아니었어.

장소도 내용도 대상도 다 적당하지 않았어.


아버지를 화장하고 아버지가 담긴 상자를 안고

우리는 제주로 돌아왔다.

남편은 항상 입버릇처럼

아버지 생전에 말을 태워드리고 싶어했다.


아버지는 작은 상자에 담긴 채

사랑하던 아들이 태워주는 말을 타게 되었다.

남편은 아버지가 담긴 상자를 안고서

조심스럽게 위로 올라갔다.


남편과 아버지 상자를 태운 말은

남편이 무릎으로 기어 다니며 돌을 골라내

다듬어 놓은 삼나무 숲길로 들어가,

삼나무들이 조용히 늘어선 사이 길을

아버지를 애도하듯이 아주 천천히 걸었다.


아버지는 분명 아들에게 그렇게 말씀하셨을거다.

너가 만든 숲길이 참 멋지구나.

너가 이렇게 편안하게 말을 태워주니 참 좋다.

고맙다. 애썼다.


우리는 아버지가 생전에 제일 좋아하셨던

우리가 가진 땅, 볕이 가장 잘드는 자리,

수형이 멋진 배롱나무 밑에

수목장으로 편안하게 모셨다.

우리가 언제든지 아버님을 들여다 볼수 있는 자리였다.

그 자리는 아버지가 건강하실 때 농담처럼

이곳은 내가 묻힐 자리라고 말씀하셨던 자리였다.


아버지가 살아계실 때 멀리 산 죄로

자주 들여다 보지 못했던 남편과 나는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야

아버지 곁에서 아버지가 생각날때마다

들여다 보게 되었다.


백일동안 꽃이 핀다는 배롱나무는

매년 아버지 기일이 다가오면

어김없이 붉은 꽃망울을 피어올린 

오랫동안 빨갛고 화사하게 아버지 곁을 지킨다.


배롱나무는 어느 해 봄날,

아버지가 나무시장에서

수형이 멋진 나무라하시며 내게 사주셨던

아버지가 생전 가장 좋아하시고 아끼나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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